며칠 전 마흔세 번째 생일이 지났다. 이십 대에 사십 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지금은 육십 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이것만은 안다. 지금의 내가 어이없을 정도로 이십 년 전의 나와 똑같은 것처럼, 이십 년 후에도 사십 년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사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이를 먹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땐 1960년대 옛 가요를 흥얼거리는 어른들을 보며 저 나이가 되면 저런 노래가 좋아지나보다 짐작했다. 잘못 짚었다. 그 분은 변한 게 아니었다. 젊었을 때 좋아하던 노래를 아직까지 쭉 좋아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변하던가. 노년의 삶은 자주 몰이해 당하거나 오해 받는다. 그럼에도 그 세계를 예습하려드는 젊은이는 없다. 그 미지의 세계를 염탐하는 자세로 나는 일본 그림책 작가 사노 요코가 노년에 쓴 에세이 두 권을 읽기 시작했다.
사노 요코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저씨 우산’이라는 제목의 그림책에서였다. 그 책은 아주 멋진 우산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아무리 비가 쏟아져도 남자가 날렵하고 반짝이는 검은 우산을 펴지 않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아까워서. 그토록 사랑하는 우산이 젖어버릴까 두려워하던 남자가 처음 우산을 펴서 빗속으로 한 발 나서는 이야기를 이 작가는 산뜻한 그림체와 담담한 플롯으로 형상화해냈다. 제 안의 단단한 껍질을 깨고 세상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민 중년 사내의 모습은, 한 인간의 성장이란 일평생 조금씩 이루어진다는 말을 새삼 일깨운다.
사노의 연보는 이렇다. ‘1938년 태어나 2010년 72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작가가 노년의 삶에 대해 쓴 에세이집의 한국어판 제목은 각각 ‘사는 게 뭐라고’와 ‘죽는 게 뭐라고’다. 인생 후반기에 병마와 싸우며 혼자 살았던 이 작가가 얼마나 겸허하고 성찰적 태도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나는 또 한 번 잘못 짚었다. 겸허한 성찰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책 안에는, 암 선고를 받고 나오면서 평소 멋지다고 여기던 수입차를 덜컥 계약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면서 ‘내 마지막 물욕이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 욕망이 있었다.
평생 작가로 살아온 그녀의 일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여성노인에 대해 가지는 통념과 거리가 멀다. 여성노인에게서 희생하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연상하는 일은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평생 가족을 위해 몸과 마음을 헌신해온 어머니, 등허리가 굽고 머리칼이 희어지고 나서도 불철주야 자식 잘 되기만을 축원하는 할머니 대신, 그녀는 끝까지 한 명의 독립적인 개인이었다. 평생 성실하게 열심히 일해 온 직업인이었으며, 누군가의 친한 친구였고, 스스로의 입에 들어가는 음식은 자급자족하는 원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몸과 자신의 생활에 대해 독립적인 결정권을 가진 완벽한 개인.
암 투병을 하면서도 작가는 여전히 운동하기 싫어하고, 친구들과 삐졌다 풀어졌다 하며, 멋진 배우와 의사를 몰래 사모한다. 삶에 대해, 스스로에 대해, 투명하고 솔직했다. 어쩌면 각종 사회적 책임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노년기야말로 ‘진짜 내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귀한 시간임을 잘 보여준다. 노인이 된다고 한 사람이 극적으로 바뀔 리 있겠는가. 인간은 여전히 우스꽝스럽고 서글프고 고독한 존재일 테고, 매일매일 소소히 상처받고 소소히 행복해하면서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어떻게 죽는가는 결국 어떻게 늙는가, 혹은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일지 모른다.
이 작가의 결론은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꽃 한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 이미 세상을 뜬 한 인간의 정직한 고백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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