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그저 스쳐 갈 인연일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여자 축구선수로서의 삶을 접고 지도자로 전향하기 위한 과정에서 ‘규칙이나 배우자’는 마음으로 등록한 심판강습회는 한 여자의 인생 항로를 바꾼 계기가 됐다. 여자심판으로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간 지 16년. 어느덧 세 차례의 여자월드컵 무대를 밟은 국내 유일의 여자 심판이 됐고, 지난해와 올해엔 여성으론 유일하게 프로축구 K리그에 이름을 올려 남자심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나 더. 지금 그녀의 옆엔 심판 동기로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된 남편도 있다. 심판경력 16년차의 김경민(35) 국제심판 얘기다.
● 내가 가면 길이 된다
김씨의 이력은 화려하다. 국내 대회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축구연맹(FIFA)과 아시아축구연맹(AFC)이 주최하는 웬만한 여자 대회는 한 번씩 경험했다. 아시아 내에선 최정상의 부심으로 평가 받는 데다 국제심판으로서도 아직 젊은 축에 속해, 실력과 체력만 유지한다면 두세 차례의 월드컵 배정도 노려볼 수 있다.
화려한 커리어를 쌓은 비결은 의외로 간단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심판이 되겠단 결심 딱 하나였다. 김씨는 “체력부터 경기를 보는 눈, 도덕성, 영어실력 모두 그 마음가짐 하나로 갖춰 온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가슴 벅찼던 순간을 묻자 “북한 심판진과 한 조를 이뤘던 이번 캐나다 여자월드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말했다.
김 씨와 심판 입문 동기인 이슬기(34) 심판 역시 젊은 나이지만 국제심판 11년 차의 베테랑이다. 고교 시절까지 여자축구 선수로 활약하던 이 씨는 IMF 여파로 여자 실업축구팀이 줄어드는 등의 악재 속에 선수의 꿈을 접고 4년제 일반 대학교 진학을 택했다. 그러던 중 국제심판 1세대인 홍은아(36) 이화여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를 보고 심판의 길에 도전했다. 여자 심판이 10명도 채 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씨는 “선수, 지도자, 심판을 겪어가며 여자축구의 성장을 곁에서 함께 했다는 점이 보람”이라며 “아직 여자월드컵 무대에 서지 못한 게 아쉽다. 다음 대회에 서기 위해 더 노력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최근엔 선수 출신이 아닌 여자심판도 크게 늘고 있다. 지난 2011년 자격을 취득한 지미정(23) 심판은 학내에서 심판 강습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뒤 호기심에 강습회에 등록해 심판이 된 경우다. 자격증을 땄을 때만 해도 심판으로서 어떻게 활동하는지 몰라서 헤맸다. 지씨는 이듬해 한 번 두 번 실전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판정을 통해 경기가 매끄럽게 마무리 되는 데 매력을 느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소소한 에피소드도 있다. 현재 체육강사로 근무 중인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어느날 지씨의 심판 활약이 찍힌 방송 영상을 공유한 것.‘정체’가 탄로나면서 그는 일약 ‘학교 스타’로 등극했다. 지씨는 “아이들이 체육 활동으로 축구 경기를 할 때도 심판을 봐 줄 수도 있다는 점도 색다른 보람”이라며 “양팀 선수들이 100%의 경기력으로 맞붙을 수 있게 돕고 싶다”고 말했다.
● 여자라서? 여자라서!
‘여자라서’ 힘든 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여자심판들은 “비슷한 판정이라도 남성 심판이 주심을 볼 때보다 항의가 더 잦은 점은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여자심판은 “아직까지 축구가 남성의 스포츠란 인식이 커서인지 여자심판들을 향한 이유 없는 불신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했다. 최민병(42) 심판을 남편으로 둔 김경민 심판은 “연애할 때는 물론 지금까지도 자칫 구설에 오를까 행실을 더 조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척박한 국내 환경도 아쉬운 부분 중 하나다. 많은 국제대회를 경험을 통해 여러 나라 여자심판의 처우와 복지 등을 접해 온 김씨는 “유럽의 경우 여자 축구대회엔 여자심판과 여자 심판감독관이 배정되는 시스템”이라며 “이 같은 제도를 통해 현역 심판과 은퇴 심판 모두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점은 정말 부러웠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여자축구 WK리그의 여자심판 전담 시스템 도입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단계다. 오규상 여자축구연맹 회장은 23일 전화인터뷰에서 “내년 WK리그에 여자심판들만 배정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라고 발했다. “큰 틀에서의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고 밝힌 오 회장은 “이미 대한축구협회와도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라고 말했다.
이 같은 추세가 확산될 경우 여자심판은 되레 ‘귀한 몸’이 된다. 대한축구협회에 따르면 2015년 11월 현재 활동중인 여자심판은 총 122명. 이 중 현행 규정상 WK리그에 뛸 수 있는 1급 심판은 24명뿐이다. 승급 가시권에 있는 16명의 2급 심판까지 범위를 넓혀도 40명 남짓의 여성 심판이 하나의 리그를 책임지게 된다. WK리그 출범이 국내 여자축구사에 한 획을 그은 ‘시즌1’이었다면, 여성 심판 시스템의 전면 도입은 ‘시즌2’를 예고하는 셈이다.
오 회장은 “대한축구협회와 올 겨울 여자심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을 계획 중”이라며 “여자심판의 활동 무대를 넓히고 양질의 심판을 육성할 수 있도록 꾸준한 논의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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