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영국의 사학자 E.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던진 유명한 화두다. ‘끊임없는 대화’라는 의미는 직관적으로도 충분히 선명하다. 이 책의 또 다른 문장에서 표현했듯이 대화는 과거와 현재,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끊임없다는 것은 변화와 상대성으로 귀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사고와 인식의 변화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바뀌는 과정은 치열한 전쟁을 연상시킨다. 과학사가인 토머스 쿤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 개념으로 이를 설명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체계)이 더 이상 수용할 수 없는 낡은 체계가 되고, 일반의 동의를 얻어 새로운 체계로 전환되는 과정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패러다임 자체는 매우 배타적이며 패러다임의 전이, 즉 변화 과정은 불편부당하고 합리적인 평가와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일종의 개종에 가깝다는 것이다.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은 사고 전환의 지난함에 대해 “오랜 기간 나와 반대되는 관점에서 다양한 사실들로 머리를 채웠던 경험 많은 박물학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젊고 새로운 박물학자들이 있어 미래를 낙관한다”고 했다. “주창자가 사라져야만 비로소 변한다”고 한 과학자도 있다. 사실의 엄밀성을 기초로 하는 과학에서도 이런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역사나 사회사상, 이념의 변화 과정은 오죽하겠는가.
YS가 갔다. ‘양김시대’의 실질적 종언이다. 민주화의 여명을 밝혔던 그 시대의 개탄스러운 그림자는 지역주의다. 수십 년 동안 강고했던 그 지역주의의 골마저도 그 구심점을 잃은 탓인지 진보와 보수, 좌우 갈등으로 옮겨지고 있다. 이념 갈등의 농도가 갈수록 짙어지니 지역주의보다 더하다는 말까지 돌고 있다. 인터넷에는 당신이 어떤 이념적 스펙트럼에 속하는지 가름해주는 테스트까지 나도는 판이다. 상식과 통념이 아니라 성향에 따라 행동하라는 뜻인가. 설문의 조잡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쉽게 가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조선시대 사색당파부터 흘러온 역사가 말해주듯이 사고와 가치관의 충돌은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 대립이다. 지역주의가 희석되는 것 이상으로 이념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간다.
갈등 자체를 백안시할 이유는 없다. 사회의 필요악이다.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특질인 동시에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모순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문제는 민주화를 이룬 이후에도 우리 사회는 갈등을 다루는 방법을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끝장을 보자’는 의지만 충만할 따름이다. 민주주의 성숙도는 제도 못지않게 파탄을 피하는 기술과 의지에 달려 있다. 힘에 기대는 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다. 무릎을 꿇린다 한들 상대가 수긍할 리 없다. 갈등의 덩어리만 더 키울 뿐이다. 다수가 납득하지 못하는 정부의 국정 교과서 추진이 그 짝이다. 극단주의와 맹동주의(盲動主義)로 문제의 본질이 훼손되는 행태도 수십 년 동안 익숙한 레퍼토리다. 갈등이 또 다른 갈등을 낳는 악순환이 언제까지 되풀이돼야 하는 걸까.
양김, 삼김시대 파벌 정치는 구시대 정치로 폄하된다. 하지만 돈 정치와 부패의 외피를 걷어내고, 오늘날 정치, 사회가 배워야 할 한 가지가 있다면 조정과 절충의 미학이다. 겉으로는 대결적 자세를 취하지만 물밑으로 절충의 길을 모색하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손을 잡는 ‘낯 두꺼운’ 정치 기술은 우리 사회가 터득해야 할 덕목이 아닌가 한다. 그 정점에 있던 YS가 떠났다. 지난해 YS는 병환으로 입원 중에 아들 김현철씨와의 필답에서 ‘통합과 화합’을 썼던 것도 길을 잃고 헤매는 갈등 사회에 대한 아쉬움으로 이해한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라든가, ‘굶으면 죽는다’라든가, 해학적인 촌철살인 화법으로 진작에 갈등 조정의 방법론을 풀어놓았더라면 좀 더 편안한 나라를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정치 9단도 방법이 없다고 본 것일까.
정진황 기획취재부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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