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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어느 노배우의 죽음

입력
2015.11.2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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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으면 깨닫는다. 오래전 내 투지폰에 메모해둔 한 고승의 말씀이십니다. 다 잊은 채 발등에 떨어진 불꽃만 끄고 살았습니다. 이번에 그 말이 진실임을 절절하게 깨달았습니다. 포기하여 주저앉을 것인가 다시 일어설 것인가 하는 순간이 부닥쳐왔습니다.

뼈가 아프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갈 일이 며칠 전 공연 중에 있었습니다. 역할을 맡으셨던 한 노배우께서 연기를 마치시고 무대 옆에서 쓰러지셨지요.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응급실에서 심폐소생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죽을 것처럼 참담했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습니다. 파리하게 식어가던 선생님의 손과 발을 보며 멍청하게 서있는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전부였습니다.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악몽에서 깨어나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차갑게 궁지로만 내몰았습니다. 연출이라는 직업에 대한 자책감이 끝도 없이 밀려왔습니다. 할 말을 다 잃고 망연자실 다른 데만 쳐다봤습니다.

대책을 세울 수조차 없었습니다. 공연은 아직 3회 차가 더 남아있었으나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노배우가 순직하신 비통한 처지에 어떻게 공연을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배우들도 극도의 충격에 휩싸였으니 누군들 공연을 할 엄두를 낼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합의하여 공연의 취소 결정을 내렸습니다.

새벽 3시가 넘어 영정에 쓸 프로필사진을 찾으러 극단 사무실을 찾아가는데, 함께 하셨던 선배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배우들이 안가고 모여 있으니 와서 상의를 하자셨습니다. 서둘러 갔습니다. 말씀인즉슨, 유명을 달리하신 선배님이 과연 무엇을 더 원하실까를 고민해 봤다. 같은 배우로서 생각해보니 이대로 주저앉기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연극이 끝까지 올라가기를 바라실 거다. 그렇다면 연극인으로서 할 수 있는 진정한 애도가 무엇이겠나. 배우들의 결연한 의지가 눈물 속에서 빛났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 깨어났습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자책감과 실의에 빠져 살 것이고 더 이상 연극인이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있을 지도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해야 합니다.

장면이 겹치지 않는 선배님께서 기꺼이 고인의 역을 대신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곧장 예술감독님께 전화를 드려 우리의 단결된 의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짧은 침묵 후에 해보십시다 하시며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대역을 하시기로 한 형님은 집에도 가지 않고 주인공 집으로 가서 대사를 외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 날 전쟁을 치루 듯이 공연을 올렸습니다. 우리는 울고 통곡하느라 퉁퉁 부운 눈으로 무대에 섰습니다.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생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커다란 현수막도 무대 위에 단아하게 올랐습니다. 관객은 아름답고 숭고했던 노배우의 죽음을 기립박수로 애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눈물이 뒤범벅이 되어 3회의 무대를 채우고 공연은 마침내 막을 내렸습니다.

고인께서는 그 기간에 두 번이나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한번은 기둥이 있는 계단 위로 올라가시면서 아쉬워하던 제 손을 잡아주셨지요. 그 손이 너무나 따듯해서 꿈에서 깼습니다. 또 한 번은 평평하고 시푸른 풀밭을 하염없이 걷고 계셨습니다. 햇살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나는 그래서 선생님이 좋은 곳으로 좋게 가셨다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연극인의 삶에 깊은 깨달음을 주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연극은 멈출 수 없다, 입니다. 쉽게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변명만 내놓게 되어 비겁해집니다. 우리는 기꺼이 당면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방식대로 선생님이 가시는 길을 배웅해드렸습니다. 고 임홍식 배우님! 당신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고선웅 연극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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