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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YS와 DJ의 사람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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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YS와 DJ의 사람 욕심

입력
2015.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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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유의 친화력으로 인재 끌어들이고

진영 안 가리고 발탁해 덧셈정치 펴

배제의 정치 판치는 요즘 본 받아야

민추협 공동의장 시절의 YS(오른쪽), DJ
민추협 공동의장 시절의 YS(오른쪽), DJ

YS와 DJ는 사람욕심이 많았다. 유력한 정치인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YS, DJ 두 사람이 각각 휘하에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라는 거대 정치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유별난 사람욕심으로 끊임없이 인재를 끌어 모았던 것이다.

물론 사람 끄는 스타일과 용인술은 서로 달랐다. YS는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단박에 호감을 갖게 하는 특유의 친화력과 인간적 매력이 있었다. 사무실로 찾아온 이에게 직접 커피를 따라 주고, 따뜻한 말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다. 혹 누가 듣기 거북한 말을 하면 “씰 데 없는 소리”라는 한 마디로 흘려 넘겼다. 정치적으로 입장과 견해를 달리하는 인사들이라도 그런 모습을 접하고 나면“인간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분”이라고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반면 DJ는 만나는 사람을 종종 긴장시키곤 했다. 독서량이 많고 온갖 사안에 정리가 잘 돼있던 그와 마주하면 주눅 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 없고 지위가 낮은 상대라도 일리 있는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수첩을 꺼내 꼼꼼히 메모했다. 실력 있는 인재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자세였다. YS의 친화력과는 또 다른 스타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그에게 있었다.

YS는 대통령 재임시절이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각계의 인재들을 발굴해 여당인 신한국당 후보로 내세웠다. 민중당 출신으로 진보성향이 강한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 ‘모래시계 검사’의 모델이었던 홍준표 경남지사,‘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 출신의 안상수 창원시장 등이 이때 영입돼 금배지를 달았다. 이들의 성향으로는 당연히 야권 개혁진보세력의 공천을 받아야 할 인물들인데 YS가 앞장서 여당으로 끌어들였다.

이 때 이회창 전 총리를 신한국당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한 것도 YS의 승부사 기질과 열린 인재관을 잘 보여준다. 문민정부 개혁바람 속에 감사원장에 이어 국무총리로 발탁됐던 이 전 총리는 총리역할 등을 놓고 임명권자인 YS와 충돌해 4개월 만에 경질됐다. 두 사람 간 감정의 골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임기 후반 국정주도와 퇴임 후를 위해 총선승리가 중요했던 YS는 그런 감정에 매이지 않고 이 전 총리에게 선대위 지휘봉을 맡겼다. 그 결과 서울과 수도권 승리를 바탕으로 139석을 얻었다. 3당 합당을 깨고 떨어져 나간 자민련이 50석을 가져 간 상황에서 이룬 선전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의 DJ는 이 총선에서 79석에 머무는 패배를 맛봤다. 그러나 전혀 성향이 다른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DJP연대를 통해 1997년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는 집권 후 총리직을 비롯해 내각의 반을 자민련에 내주고, 노태우 청와대의 정무수석 출신인 김중권씨를 초대 청와대비서실장에 발탁했다. DJ가 취약한 집권기반에도 YS 문민정부의 유산인 환란을 조기에 극복하고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등 국정을 원활히 이끌 수 있었던 것도 인재를 넓게 구하는 덧셈정치를 한 덕분이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널리 구하는 열린 인재 등용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진보정권 10년 동안의 허기 탓인지 이명박 정부는 대선 캠프인맥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고, 박근혜 정부도 협소한 수첩 리스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러 통로로 다양한 목소리를 듣던 YS, DJ시대 소통의 정치도 보기 힘들어졌다. 100% 국민통합 약속과는 달리 배제와 소외 정치가 심해지고 있기도 하다.

6년 전 DJ가 세상을 떠난 데 이어 22일 YS도 뒤를 따름으로써 우리 현대정치사를 풍미했던 양김(兩金)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가신ㆍ패거리 정치와 지역주의 정치 등 청산해야 할 양김시대의 부정적 유산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인재를 널리 구하고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친화력과 소통의 정치가 있었다.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진 양김시대가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다.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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