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룬디 태권도 국가대표 에머리
20년 넘도록 내전 끊이지 않자
올해 광주U대회 왔다 난민 신청
지난 10년간 전체의 4%만 통과
"미래 어둡지만 희망 잃지 않아"
19일 오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한 태권도장. “파~사(破邪)!” 흑인 청년의 입에서 마음 속 악함을 없앤다는 뜻의 구호가 터져 나왔다. 새하얀 도복 때문인지 청년의 피부는 유달리 검게 보였다. 날렵한 동작이 예사롭지 않은 청년의 이름은 에머리 바루트와나요(26). 이름도 생소한 중앙아프리카의 작은 내륙국 브룬디가 그의 고국이다.
에머리는 올해 7월 열린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브룬디 태권도 국가대표로 참가했다. 하지만 4개월이 지나도록 그는 여전히 한국에 머물고 있다. 사연은 이렇다. 브룬디는 20년 넘게 내전을 겪고 있다. 1962년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뒤 위태롭게 이어지던 평화는 93년 종족간 갈등이 폭발하면서 깨졌다. 내전으로 희생된 인원만 30만명에 달했다. 2005년 내전 종식 후 화합을 약속한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당선됐지만 그 역시 10년째 독재 정치를 펴고 있다. 그래서 반정부 투쟁이 끊이지 않는다. 에머리는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가담하면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며 “함께 태권도를 배우던 친구가 경찰 총에 맞아 숨지는 장면을 눈 앞에서 목격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에 반기를 든 쿠데타는 지난 5월 실패로 막을 내렸다. 10만명이 넘는 피란민이 속출하는 가운데 에머리 역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한국에 왔다. 시합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동료 선수의 마을에서 주민 7명이 살해됐다는 기사를 접하고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대회 도중 선수단을 이탈한 뒤 난민 신청을 한 것이다.
독재정권의 총구는 가까스로 피했으나 한국에서의 삶은 가시밭길이었다. 아는 한국말이라곤 ‘태권도’뿐이었고 취업비자조차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난민지원센터에 머물며 일주일에 두 번씩 한국어 수업을 듣는 게 전부였다. 2012년 아프리카와 유럽 전 국가가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해 대통령상까지 받은 실력자였지만 한국에서 가방 속 도복을 꺼낼 일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다.
기적은 오래 가지 않아 찾아 왔다. 에머리의 딱한 사연을 접한 동작경찰서와 인근 태권도장의 도움으로 그는 지난 9월부터 다시 도복을 입게 됐다. 박정택(37) 관장은 “에머리는 도장에 가장 먼저 나와 한국 학생들도 안 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를 깍듯이 할 정도로 성실하다”며 “품새, 발차기 등 실력도 상당해 사범이 될 자질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태권도가 이어준 한국과의 인연이 과연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을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에머리는 현재 임시체류만 인정될 뿐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유령 거주자’에 불과하다. 난민 심사 통과 여부도 불투명하다. 지난 10년 동안 난민신청자 1만773명 중 받아들여진 사람은 전체의 4%(464명)에 그칠 만큼 난민 심사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게다가 최근 이슬람국가(IS)의 연이은 테러로 불법체류 외국인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고 있는 점도 그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래도 에머리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10년간 익힌 태권도는 언어의 장벽도 넘어서고 있다. 도장에서 수련하는 것도 모자라 그는 밤마다 지원센터 뒷마당에서 매일 2시간씩 품새를 연마한다. 에머리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선수가 2011년 브룬디로 건너와 직접 태권도 시범을 보인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했다. 그가 지금 입고 있는 도복도 당시 문 선수가 준 것이다. 에머리는 “다른 직업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꼭 태권도 사범이 돼 브룬디와 한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신혜정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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