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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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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에 부쳐

입력
2015.11.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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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와 국가발전에 바친 평생의 삶

문민정부 개막과 개혁 오래 기억될 것

공과 평가는 역사의 몫, 편히 영면하길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필생의 신념이었던 민주화 투쟁과 대통령 재임 시 눈부신 개혁으로 헌정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우리시대 큰 별이 졌다. 국민과 함께 깊은 애도를 표하며 부인 손명순 여사 등 유족에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의 민주화 투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함께 협력하고 경쟁하며 우리 현대정치사를 이끌었다.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은 그의 서거로 파란만장했던 ‘양김(兩金)시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민주화와 국가발전에 바쳐진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YS’란 애칭과 함께 오래도록 국민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27세의 나이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당선된 이후 14대 국회의원까지 9선을 기록했다. 그 동안 야당 당수 3 차례, 야당 원내총무 5차례를 역임하며 치열하게 독재정권에 맞섰다. 1970년대 초에는 ‘40대 기수론’으로 DJ와 함께 야당의 세대교체를 이끌어내 민주화투쟁 진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1979년 8월 제1야당 신민당 총재로 YH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사건 때 노동자편에 서서 싸운 일은 유신정권 몰락 등 정치격변으로 이어지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의원직 제명 등 박정희 정권의 박해에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박 정권의 탄압은 그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마산 지역민들의 저항을 불러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됐고, 이 시위 진압을 둘러싼 권력내부의 첨예한 갈등이 결국 유신정권의 종말을 불러 온 ‘10ㆍ26사건’으로 이어졌다.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투쟁은 전두환 정권에서도 계속됐다. 1983년에는 광주 5ㆍ18민주화운동 3주년을 계기로 민주인사 석방 등을 요구하며 23일에 걸쳐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결행했다. 이 같은 그의 투쟁에 힘 입어 야권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에 이어 1985년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돌풍을 일으키며 군사정권을 압박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 내기까지에는 김 전 대통령의 민주화를 향한 신념과 리더십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어렵게 쟁취한 직선제로 1987년 12월 치러진 대선에서 양 김씨는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하고 각각 출마함으로써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을 저버렸다. 더욱이 양 김씨의 단일화 실패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지역대립을 한층 심화시키는 결과도 초래했다. 양 김씨가 국민과 역사 앞에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다.

이듬해 치러진 13대 총선 결과인 여소야대 구도 하에서 김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결행해 집권당 대표로 변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이 오랫동안 싸워왔던 쿠데타 세력과의 결합을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했지만 ‘야합’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집권여당의 대통령 후보자리를 쟁취하고 마침내 1992년 12월 대선에서 필생의 라이벌인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돼 문민시대를 활짝 열어 제쳤다. 과정이 어땠든 우리 헌정사에서 군사 권위주의정권을 영원히 종식시킨 의미는 대단히 크다.

김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를 출범시키자마자 각종 개혁조치들을 쏟아냈다. 취임과 동시에 솔선해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고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제를 도입했다. 지하경제의 검은 돈 차단하기 위한 금융실명제를 전격 단행했고, 정치군인들의 온상이던 군 내부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했다. 비자금 축재와 군사쿠데타 의 책임을 물어 전두환ㆍ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도 밀어붙였다. 그가 아니고선 불가능했을 눈부신 개혁으로 임기 초반 그의 지지도는 90%에 달할 정도로 치솟았다. ‘칼국수’로 대변됐던 검소한 그의 청와대 생활도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임기 후반 금융정책 실패 등으로 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다.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연이은 도산 등 도처에서 나타난 경제위기 신호에 안이하게 대처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6ㆍ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이 사태로 하루아침에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고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몰렸다. 환란의 원인에 대해 여러 주장이 있지만 가장 무거운 책임은 김 전 대통령이 질 수밖에 없다.

차남인 김현철씨가 국가의 주요 인사와 정책을 좌지우지 하도록 방치해 국가권력 사유화 논란을 일으킨 것도 큰 실책이었다. 대통령이 공조직보다 사적 관계에 의지했으니 국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결국 아들을 권력남용 및 탈세혐의로 감옥에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어두운 그늘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아 김 전 대통령이 평생을 바쳐 일군 민주화와 국가발전에 대한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못한 것은 못한 대로 이제 역사의 평가에 맞일 일이다. 김 전 대통령도 이제 무거웠던 역사의 짐을 내려놓고 평안한 영면에 들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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