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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와 DJ, 저 세상에서 ‘평생 동지’로

입력
2015.11.2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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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YS) 전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이다. ‘3김 시대’의 양대 축이던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이자 필생의 라이벌이었다.

출발은 YS가 빨랐다. 그는 26세이던 1954년 제3대 민의원선거에서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4대 총선에서 고배를 마신 YS는 5대 국회에 재입성했는데, 이 때 DJ도 같은 당 의원으로 정치무대에 올랐다. 한평생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던 두 거목이 한 배를 타는 순간이었다.

1987년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 쟁취 실천대회’에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앞두고 시종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YS 와 DJ.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거국중립내각 쟁취 실천대회’에서 야권후보 단일화를 앞두고 시종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YS 와 DJ. 한국일보 자료사진

DJ와의 첫 대결은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이었다. 나이는 한 살 어렸지만 정치 선배였던 YS가 DJ를 눌렀다. 그러나 1970년 나란히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맞붙은 대선후보 경선에서는 DJ에 역전패했다. 당시 YS는 “김대중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이며 곧 나의 승리”라며 DJ를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정치적 동지가 됐다.

군부독재와의 힘겨운 싸움에 두 사람은 늘 함께였다. YS는 1979년 10월 뉴욕타임스를 통해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 철회를 요구한 뒤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 등의 고초를 겪었고, DJ도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당하는 등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뒤 DJ는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YS는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으로 군부독재에 맞섰다. YS와 DJ는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 이듬해 2ㆍ12 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을 일궈냈고, 이 여세를 몰아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끌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쟁취해냈다.

하지만 1987년 13대 대선에서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뒤 두 사람은 사실상 정적이 됐다. 양김은 국민적 여망을 외면한 채 모두 대선에 출마했고, 결국 민주정부 출범에 실패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영ㆍ호남 민주화 세력의 분열도 심화하면서 지역주의 정치의 폐해로 이어지게 됐다.

1990년 민주당을 이끌던 YS가 민주정의당ㆍ신민주공화당과 이른바 ‘3당 합당’을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됐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YS는 DJ를 누르고 당선된 뒤 ‘문민정부’를 출범시켜 금융실명제 도입, 하나회 척결 등의 성과를 일궜다. 하지만 이는 ‘호남 고립’을 통한 지역주의 정치구도를 고착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20년 이상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계속돼온 두 사람의 외면은 2009년 8월 DJ 서거 직전에야 매듭이 풀렸다. YS는 투병중인 DJ를 문병했고, 화해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제 그럴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DJ의 병세가 악화한 때라 두 사람이 조우하지는 못했다.

이제 두 사람은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 평생의 민주화 동지로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됐다.

정민승기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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