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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아버지 정약용, 유배지에서도 최고의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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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사람으로 세상읽기] 아버지 정약용, 유배지에서도 최고의 멘토

입력
2015.11.2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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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두 아들에게 쓴 家戒

남이 돌 던지면 옥돌로 보답하라

도성 십 리 안쪽에 살아라

절망하지 말고 항상 당당하라

정약용은 정조의 보살핌에 힘입어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온 집안이 몰락했다. 한때 유망했던 청년학자 정약용은 18년 동안 서남해안 강진에 유배되어, 가난과 고독을 벗하며 늙어갔다. 하지만 그의 푸른 뜻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학문을 갈고 닦아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뜻을 세웠다.

그에게는 멀리 경기도 양주 마재에 두고 온 가족들이 있었다. 유배지에서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홀로 삭이며, 편지를 쓰고 또 썼다. 아버지의 편지, 고향의 가족들에게 그것은 험난한 세파를 피해 안전한 뭍으로 인도하는 등댓불이었다.

되풀이되는 실패와 낙오, 실직과 신변의 여러 위협들. 이처럼 자질구레한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아버지 정약용’에게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 청고한 기개를 떠올리면 부럽고, 부끄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인생 지침 자식에게 들려준 ‘하피첩’

지난달 중순 국립민속박물관은 정약용에 관한 귀중한 유물을 공개하였다. ‘하피첩’(보물 제1683-2호)이 그것이다.

“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에 애틋한 마음 전해왔네. 오랜 세월에 붉은 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으로 꾸며,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1810년 유배 죄인 정약용은 아내 홍씨부인이 보낸 치마를 받았다. 시집올 때 아내가 입었던 다홍치마 5폭이었다. 그는 낡은 치마폭을 자르고 중국산 종이를 오려 붙여 아담한 서첩을 꾸몄다. 가족들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큰아들 정학연은 28세, 둘째 아들 정학유는 25세였다. 서첩의 명칭은 ‘하피첩’이라 했다. ‘붉은 노을빛 치마로 된 서첩’이라는 뜻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특별한 방식으로 가족 사랑을 표현했다.

그 서첩은 가보가 되어 대대로 전해졌다. 그러다가 6ㆍ25 전쟁 때 분실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2005년 폐지 수집으로 생계를 잇는 어느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버지 정약용은 ‘하피첩’을 통해 인생의 귀중한 가치를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선비의 올곧은 마음가짐을 알려주고 싶었다.

하피첩. 문화재청 자료
하피첩. 문화재청 자료

정조의 사랑 받다 신유박해로 몰락

천주교 탄압이 본격화되기 전까지만 해도 정약용의 가족들은 남부러운 줄 몰랐다. 그 집안은 남인을 대표하는 명문가였다. 조상 대대로 홍문관의 영예로운 벼슬을 거듭해 ‘8대 옥당(玉堂ㆍ홍문관) 집안’이란 명성이 자자했다. 영조 때는 조정에서 배제되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자 벼슬길이 다시 열렸다. 정조는 남인의 영수 채제공을 비롯해 이가환 등 여러 명의 젊은 인재들을 발탁하였다. 정약용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789년 정약용은 문과에 급제했다. 얼마 뒤 정조는 그에게 화성행차에 필요한 배다리를 만들라고 했다. 나중에는 화성의 건설 사업에 참여시켜 큰 공을 세우게 하였다. 정약용은 ‘초계문신’(抄啓文臣ㆍ대신들의 추천으로 뽑힌 젊은 문신)으로도 뽑혀, 당대 최고의 재사들과 나란히 조정에 섰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정약용은 병조참지(정3품)와 형조참의(정3품) 등의 고위직에 올랐다. 장차 몇 년 뒤에는 정승 판서로 등용될 전망이 보였다. 정약용과 부인 풍산홍씨, 그리고 어린 자녀들에게 호사스런 인생의 봄날이 이어졌다.

1800년 정조가 쓰러지자 천주교 문제가 중대 현안으로 등장했다. 1790년대에도 이미 그 시비는 두어 번 일어났다. 그래도 그때는 정조의 적극적인 비호 덕분에 큰 타격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1801년 정약용의 3형제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존망의 기로에 섰다. 노론과 북인도 일부 포함되었지만 희생자의 대부분은 남인들이었다. 이른바 ‘남인 신서파’ 곧, 남인 출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은 가혹했다.

“남이 돌을 던지면 옥돌로 보답하라”

정약용의 ‘하피첩’을 나는 아직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서첩이 제작된 그 해 가을 정약용이 쓴 글 ‘두 아들에게 주는 가계(家戒)’를 ‘다산시문집’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글이 바로 ‘하피첩’에 기록된 내용일 것이다.

20대 후반의 두 아들에게 정약용은 ‘효제(孝悌)’를 신신당부했다. ‘논어’에도 기록되어 있듯 “효제는 인(仁)을 행하는 근본”이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정약용처럼 곤경에 처하고 보면 “한두 말의 곡식”을 두고 친척들이 서로 “다투고 끔찍한 말까지 일삼다”가 “원수 되기가 쉬웠다”.

그럴 때일수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저쪽에서 돌을 던지면 이쪽에서는 옥돌로 보답하라”. 마음을 넉넉히 써야만 “모두가 감동하고 기뻐하여 저절로 화목한 가문이 된다”는 것이다. 위기에 처한 정약용 일가로서는 “문호(門戶)를 보존”하는 것보다 시급한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약용이 이런 가르침을 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하나, 정약용은 자식들에게 수도권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문화(文華)의 안목(眼目)을 떨어뜨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이러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죄인 명부에 적혀 있으므로, 너희에게 시골집에 숨어 지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차는 도성에서 십 리 안쪽에 살아야 한다. 가세가 기울어 도성 안에 들어갈 형편이 못 되면, 근교에 터를 잡아 과일나무도 심고 채소도 가꾸며 생계를 돌보아라. 그리하여 재산이 모이면 도심 한복판으로 옮겨라.”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는 너무 컸다. 아직도 정약용의 훈계에 수긍하는 시민들이 적잖을 것이다. 과연 언제쯤이나 우리는 거주지에 따른 문화적 간극을 극복할 수 있을까.

끝으로, 가족들에게 정약용은 언제나 밝고 명랑한 마음을 가져달라고 요청했다. “몰락하여 버림받은 집안 식구들은 세상이 잘 돌아가도 걱정이 많다.” 그들 자신은 물론이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모두 세상의 버림을 받아, 벼슬길이 막혀 원망을 일삼는 부류이라서 그런 것이다.” 절망감이 깊으면 도리어 재기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 것이라고 정약용은 경고했다. “진심으로 당부하거니와 늘 심기(心氣)를 화평하게 가지기 바란다. 마치 벼슬길에 오른 사람인 것처럼 항상 당당해야 한다.” 진취적이고 구김살 없는 태도, 이야말로 불우한 처지를 뒤집는 비결이라는 정약용의 충고다. 그 말에 과연 일리가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가르침 이어서 편 세 아들

아버지의 훈계가 그저 허언에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버지 정약용은 유배의 형벌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바꾸었다. “소싯적에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지난 20년 동안 세상맛에 빠져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잊고 지냈다. 이제 마침 여가를 얻었도다!”(‘자찬묘지명’) 그는 유배지의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500권도 넘는 저술을 남겼다. 후세는 그에게 실학사상의 집대성자라는 칭호를 선사했다.

큰아들 정학연도 학문에 일가를 이루어 19세기의 대학자 완당 김정희의 벗이 되었다. 정약용의 장손 정대림도 학문에 힘써 호군이 되었고, 그 아들 정문섭도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 역시 부친의 ‘실사구시’ 정신을 이어 ‘농가월령가’를 지었다. 그의 아들 3형제는 온건개화파의 영수 운양 김윤식과 교유하였고, 큰아들 정대무는 북청현감이 되어 ‘목민심서’의 정신을 실천에 옮겼다.

하지만 1910년 이 나라는 민중의 비원 속에 망하고 말았다. 그들의 작은 성취로는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아버지 정약용의 가르침이 세월의 풍파를 이기고 대대로 이어진 것은 다행이었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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