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테러 후폭풍 휩싸인 대중문화
폭탄 설치·자살테러 내용에 美드라마 '슈피겔' 등 편성 바꿔
지난 13일 파리에서 벌어진 동시다발 테러의 타깃은 주말을 즐기기 위해 스포츠 경기장과 공연장, 그리고 레스토랑으로 나온 대중이었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의 의미가 실린 장소는 한 곳도 없었기에 대중을 무차별 희생시킨 이슬람국가(IS)의 공격에 대한 전 세계의 충격은 더욱 컸다. 이 가운데 89명이 한 장소에서 목숨을 잃은 파리 바타클랑 극장은 파리 시민들에겐 클래식은 물론 대중음악 무대를 대표하는 장소로 사랑 받아온 곳이다.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는 물론 벨벳 언더그라운드, 오아시스, 프린스 등 유명 대중음악 스타들의 공연이 이어진 명소이다. 이날 무대에 오른 ‘이글스 오브 데스 메탈’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던 팬 1,500명이 마주한 공포와 아픔에 대해 세계적인 록 그룹 유투의 리더 보노는 “음악을 직접적으로 겨눈 첫 번째 공격이었다”라고 평했다. 보노의 일요일 파리 공연역시 취소됐다.
테러 연상 TV드라마 방송 연기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대중문화계가 파리 테러의 후 폭풍에 휩싸였다. 보노의 말처럼 대중문화 업계자체가 직접적인 테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럽 문화의 중심인 파리가 슬픔에 잠겨있는 마당에 대중의 흥을 끌어올리는 대중문화 본연의 임무를 계속해야 할지 고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할리우드의 흥행 오락물들은 하나같이 테러범들의 공격을 연상케 하는 액션물이다. 희생자 가족들을 생각하면 그대로 방송이나 상영을 이어가기 힘들다.
이번 주 미국 방송사들은 테러 공격을 떠올릴 수 있는 드라마 방영을 일제히 중단했다. 미 CBS는 월요일 방송 예정이던 ‘슈퍼걸(Supergirl)’의 새 에피소드를 건너 뛰었다. 이 에피소드에는 테러범들이 주요 도시들에 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이 담겨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CBS는 23일 방송 분으로 잡아뒀던 추수감사절 관련 에피소드를 방송했다. 같은 날 방송되는 ‘NCIS 로스엔젤레스’도 황급히 편성을 바꿨다. 당초 월요일 방송예정이던 에피소드는 한 여성이 IS 테러범들처럼 자살폭탄테러를 벌이는 단체와 연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슈퍼걸’과 마찬가지로 방송사는 12월 방영 예정이던 에피소드를 임시방편으로 끌어와야 했다. ‘오랜 이별(The Long Goodbye)’이란 제목의 이 에피소드는 헤어진 동료를 찾는 내용으로 테러리즘과는 관계가 없다. 할리우드리포트 등 미국 연예전문지들은 “이들 프로그램은 대형 테러가 실제로 벌어졌을 때 현실의 상황을 증폭시켜 보도록 하거나 자꾸 연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대중의 요청이 있기 전에 편성을 바꿔야 했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떠들썩한 오프닝으로 유명한 NBC의 ‘새러데이 나이트 라이브(SNL)’는 “빛의 도시 파리의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점잖은 메시지로 문을 열었다.
대형 테러를 맞아 급히 예정된 스케줄을 바꾸기는 영화나 대중음악 공연계도 마찬가지였다. 주연 제니퍼 로런스를 할리우드 배우 연간 수입 순위 2위(5,200만 달러)로 끌어올린 할리우드 영화 ‘헝거 게임(The Hunger Games : Mockingjay-Part2)’시리즈의 마지막 편이 금주 전세계 개봉을 앞두고 진행하기로 했던 대형 개봉행사를 축소했다. 이 영화의 일부 장면들은 프랑스에서 촬영된 것으로 전해졌다. 영화배급사 측은 파리 테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인터뷰와 레드카펫 행사를 취소하거나 축소했다. 이밖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하고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 ‘스파이 브릿지(Bridge of Spies)’와 나탈리 포트먼이 열연한 서부극 ‘제인 갓 어 건(Jane Got A Gun)’의 개봉 행사들도 취소됐다.
쇼는 계속되어야 할까?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을 상상해 만들어지는 영화나 TV드라마는 종종 대중의 지탄을 받을 때가 있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구현된 살인이나 테러방법이 실제 사건에서 적용됐을 때 대중은 해당 영상물이 범인에게 그럴듯한 모티프가 되었을 수 있다고 쉽게 믿는다. 때문에 여론의 십자포화를 우려한 제작사나 방송사가 이처럼 일찌감치 편성을 바꾸거나 행사를 취소하는 사례는 자주 일어난다.
올 여름 미 케이블방송사 USA네트워크는 인기 드라마 ‘미스터 로봇(Mr. Robot)’의 마지막 회 방송을 연기해야 했다. 당시 생방송 도중 과거 동료가 방송사 기자와 카메라맨을 총기로 살해한 사건이 버지니아주 베드포드 카운티에서 발생해 떠들썩했는데 하필이면 이 드라마에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 2013년에도 NBC가 수사 드라마 ‘한니발’의 방영을 중단한 적이 있는데 학생 20명이 사망한 샌디후크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과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이유였다. 2011년엔 허리케인 피해자들을 위해 폭풍 재난 내용이 들어가는 애니메이션 ‘패밀리 가이(Family Guy)’등의 방송이 취소됐다.
사건사고로 인해 대중문화업계가 타격을 입기로는 2001년 9ㆍ11 테러 당시가 가장 심했다. 항공기 승무원의 이야기를 다룬 귀네스 팰트로 주연의 영화 ‘뷰 프럼 더 톱(View from the top)’은 당초 2001년 12월 개봉 예정이었으나 비행기 테러 희생자들을 감안해 2003년이 되어서야 스크린에 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와 유사한 플롯으로 이뤄졌다는 이유 만으로 영화나 드라마가 사건 발생 후 한동안 상영 연기되는 관행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아무리 세상이 험악해도 ‘쇼는 반드시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내주 개봉을 앞둔 프랑스 영화 ‘레스 카우보이(Les Cowboys)’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사귀게 된 딸을 찾는 가족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상영 연기가 불가피한 상황. AFP통신에 따르면 영화배급사측은 개봉 계획을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굳힌 상태이다. 한 관계자는 “영화를 통해 현실의 아픔과 어려움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고 본다”라며 큰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때 그 책임의 일부를 대중문화로 돌리는 행태에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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