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미국 극우인종주의의 상징 윌리스 카토
베일에 가려진 사생활
전화번호 숨기고 선불폰 사용
측근들도 주소 아는 이 드물어
언론 인터뷰, 사진 촬영도 거부
“유대인 학살 증거 제시하라”
佛 라시너 주장 잇따라 출간
5만달러 내걸고 음모론 펼쳐
우파 안에서도 ‘걸림돌’ 손가락질
극우파의 지도자 ‘리틀 히틀러’
우익단체, 언론 끊임없이 만들고
다문화, 여성평등에 강고한 반대
“네오콘은 이스라엘 광신자” 조롱
1979년 ‘역사비평협회 Institute for Historical Review(~93년)’라는 미국의 반유대주의 학술단체가 황당한 공개제안을 한다.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유대인이 학살당한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에게 5만 달러를 주겠다’는 거였다. ‘협회’는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모든 증언과 증거들은 조작됐고, 학살 책임자 루돌프 헤스(1894~1987)의 자백 역시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저 공개제안은 자신들에게 삿대질하는 학계와 시민ㆍ단체에 대한 기세 등등한 선전포고였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이 날조한 허구이거나 과장이라는 주장은 1960년대 초부터 프랑스인 폴 라시너(Paul Rassinier, 1906~1967) 등에 의해 제기돼왔다. 라시너는 나치의 수용소 가스실(샤워실)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실제로 그런 일이 있기나 했는지 의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반 나치 레지스탕스로 43년 10월 나치에 검거돼 부헨발트 등지에서 강제노역을 했던 인물. 수감자가 자신의 체험담과 더불어 제기한 저 의문은 반유대주의 음모론의 더 없는 불쏘시개였다.
라시너의 책들을 미국서 도맡아 출판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의 주장을 전파한 이는 극우 인종주의자 윌리스 카토(Willis Allison Carto)였다. 78년 ‘역사비평협회’를 설립하고 기관지인 월간 ‘저널 역사비평’등을 발행한 것도, 저 제안을 공개 천명한 것도 카토였다.
캘리포니아에 살던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업가 멜 머멜스타인(Mel Mermelstein, 1926~)이 저 제안에 맞섰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그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것을 본 목격담과 다수의 증언들, 사진을 비롯한 각종 사료들과 함께 학살에 사용된 청산가스 ‘치클론 B(Zyklon B)’ 용기를 제시했다. 그리고 1년 뒤, 묵묵부답이던 협회를 상대로 상금 5만 달러와 정신적 위자료 100만 달러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81년 10월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은 “1944년 여름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가스로 학살 당한 것은 의문의 여지 없는 사실”이라며 “단 구체적인 배상액은 양측 변호인단이 협의해서 알려 달라”고 판결했다. 85년 7월 양측은 보상금 5만 달러와 위자료 4만 달러, 그리고 협회의 공식 사과에 합의했다.(NYT, 1981.10.9)
하지만 법원도 카토와 협회의 신념을 꺾지는 못했다. 그에겐 저 판결이야말로 유대인의 막강하고도 사악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그는 20대 후반 이후 근 60년의 생애를 차별과 배제, 혐오의 네트워크 확산에 바쳤다. 의회 로비스트와 선거운동가로 활동했고, 헤아리기조차 힘들 만큼 많은 극우 단체와 신문ㆍ잡지를 창간했고, 더러는 배후에서 조종했다. 명예훼손 등 적지 않은 소송에 휘말렸고, 우파집단 내에서조차 “우파의 걸림돌”이라 손가락질 당한 적도 많지만, 저 끈질긴 활동이 증명하듯, 그에겐 사람과 돈(후원)이 끊이지 않았다. 미국 신나치 인종주의의 ‘중추신경’이자 극우의 상징으로 불리는 윌리스 카토가 10월 26일 심장 질환으로 숨졌다. 향년 89세.
카토는 1926년 7월 17일 인디애나 주 포트웨인에서 태어나 오하이오 주 맨스필드에서 자랐고, 고교 졸업 후 미 육군에 입대해(44~46년) 2차 대전을 치렀다. 44년 필리핀 전선에서 부상 당해 이듬해 5월 ‘퍼플 하트’훈장을 받았다. 오하이오 주 데니슨대와 신시내티대 로스쿨을 중퇴했고, 다국적 소비재 기업인 P&G에서 잠깐 일했다. 20대 중반께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해 한 소비자금융회사에서 수금원으로 일했고, 58년 독일 태생의 엘리자베스 발트라우드 올데마이어(Elisabeth W. Oldemeir)라는 여성과 결혼, 동지로서 해로했다. 저 짧은 이력이 알려진 사적인 삶의 전부라 해도 좋을 만큼 그는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언제, 어떤 계기로 그가 극단에 서게 됐는지도 사실 알려진 바 없다. 결혼할 무렵 그는 이미 극우 인종주의자였다.
매카시즘의 극성기이던 1953년, 그는 ‘자유와 자산 Liberty & Property(55~60년)’이라는 우익단체를 만들어 월간지 ‘Right’를 발행했고, 55년 워싱턴 D.C에 본부를 둔 저 유명한 극우단체 ‘리버티 로비 Liberty Lobby(55~2001년)’를 설립했다. ‘리버티 레터Liberty Letter’라는 소식지와 주간지 ‘서구의 운명 Western Destiny(64~66년)’, 66년 인수한 잡지 ‘American Mercury(~81년)’, 워싱턴 정가 소식을 전하는 ‘워싱턴 옵저버(65~76년)’등을 발행했다. ‘리버티 로비’의 사실상의 기관지로 75년 창간한 주간지 ‘스포트라이트 Spotlight’는 내분으로 조직이 와해된 2001년까지 26년간 1,350호를 냈고, 전성기인 80년대 중반에는 발행부수가 35만 부에 달했다.
1960년대는 그가 신좌파 운동에 맞서 인권 법안들을 저지하기 위해 의회 로비스트로 분투하던 기간이었다. 증세 반대, 해외원조 반대, 총기규제 반대, 흑백통합을 위한 스쿨버스 정책 반대, 여성 평등권 반대, 세계화ㆍ다문화주의 반대, 이민정책 반대…. 그는 패배할 때마다 점점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더 강고한 벽을 쌓아갔다.
68년 그는 ‘월러스를 돕는 청년들 Youth for Wallace’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대표적인 인종분리주의자였던 당시 앨러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George C. Wallace)의 대선 출마를 지원한다. 그 조직은 월러스 좌절 이후 ‘전국청년동맹 National Youth Alliance’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했고, 71년 보수 백인우월주의 조직인 ‘전국동맹 National Alliance’로 변신했다. 백인우월주의 단체 ‘Ku Klux Klan’리더였던 데이비드 듀크(David Duke)가 88년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만든 ‘포퓰리스트당(Populist Party)의 설립을 앞장서 돕기도 했다.
그의 극우이념을 지탱한 기저 사상은 인종주의, 특히 반유대주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순혈주의를 지키면서 서구 사회는 ‘혼혈’로 ‘오염’시켜왔다고 믿었고, 그래서 알래스카와 하와이의 주 편입에도 저항했다. 그의 신념은 친나치 사상가 프랜시스 파커 요키(Francis Parker Yockey)를 알게 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나치 전범재판의 연합국 검찰 일원이던 요키는 “피고들의 법률적 권리가 연합국의 강압으로 묵살당하고 있다”며 사퇴, “서구 문명의 쇠퇴를 조장한 주범 유대인들의 세계 지배 음모를 폭로”한 600쪽 분량의 악명 높은 책 ‘임페리엄 Imperium’을 썼다. 루스벨트조차 모사드 요원으로 치부했던 그는 아랍민족주의를 유대-미국 권력의 중요한 견제세력으로 여겼고, 실제로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반 시오니즘’ 선전가로 일하기도 했다. 요키의 책을 읽고 감동 받은 카토는 60년 여권법 위반으로 샌프란시스코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면회했다. 2008년 ‘윌리스 카토와 미국의 극우(Willis Carto and the American Far Right)’라는 책을 쓴 극우사상 연구자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 웨스트필드 주립대 교수)은 그 15분간 면회를 “카토 생애의 메이저 이벤트였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훗날 한 조직원이 몰래 빼내 법정에 공개한 카토의 글은 요키의 사상을 베껴놓다시피 한 거였다. “히틀러의 패배는 유럽과 미국의 패배였다. 우리는 얼마나 장님 같은가? (… 그렇게 된 까닭은) 서구 문명을 위해 독일이 수행한 역할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려온 유대인들의 거짓 선전 때문이었다.(…) 만일 사탄이 국가와 민족의 영구적인 파괴를 위해 초인적인 지혜와 악마적인 권능을 총동원해서 어떤 일을 꾀하더라도, 유대민족을 만들어낸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counter-currents.com, 2011.6.16)
그의 활동 자금은 일부 출판물 판매 수익을 빼면 대부분 회비와 후원금으로 충당됐다. 1970년 ‘리버티 로비’의 회원은 25만 명에 달했고, 80년대 전성기 때의 한 해 예산은 400만~50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수금원으로서는, 그는 유능했다.
카토는 유대인 시민인권단체 ‘반-비방 연맹 Anti Defamation League’의 평가처럼 “증오 네트워크의 지휘자”였지 현장에서 메카폰을 드는 선동가는 아니었다. 사생활과 신분 노출을 극도로 꺼린 그를 워싱턴포스터는 ‘은둔자’표현했다. 71년 워싱턴포스터 기자가 어렵사리 그의 행적을 추적해 만나는 데 성공했지만, 그는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WP, 15.10.31) 주소는 측근들조차 아는 이가 드물었고, 전화번호는 당연히 등록하지 않았다. 일 때문에 통화할 때는 주로 선불폰을 쓸 정도였다고 한다.(NYT, 2015.11.1) 그의 단체들, 특히 반유대주의의 아성이던 역사비평협회 본부는 시위의 잦은 표적이었고, 여러 차례 방화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84년 7월 누군가의 방화로 협회의 책과 자료 등 90%가 소실돼 약 50만 달러의 피해를 입은 적이 있었다. 히틀러의 청동 흉상 네 개가 그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에 대한 진영 내부의 반발과 내분도 적지 않았다. 조직 내 라이벌을 FBI 첩자라 비난했다가 명예훼손 소송을 당하기도 했고, 불투명한 회계와 자금 집행으로 고발당하기도 했고, 그 와중에 조직이 와해되기도 했고, 그가 조직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 보수잡지 ‘National Review’의 창간편집인 윌리엄 버클리는 카토과 그의 조직을 “무책임하고 보수주의의 대의에 손상을 끼치는 자들”(NYT 위 기사)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협회에서 쫓겨난 것은 1993년이었다. 카토는 밀려나기 직전 반대파와 변호사들에게 협상을 제안, 그들을 모임 장소에 기다리게 한 뒤 동조세력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가 자물쇠를 교체하고 전화선을 끊은 채 버티다 경찰에 끌려 나온 적도 있었다.(WP, 위 기사)
94년 협회가 와해되고 저널 발행이 중단되자 그는 곧장 격월간지 ‘반스 리뷰(Barns Riview, 94~2001년)를 창간했고, 그 잡지마저 폐간되자 주간지 ‘American Free Press’를 창간했다.
무서운 집념과 독선적인 스타일로 그는 조직 내에서 ‘리틀 히틀러’로 불리곤 했다고 워싱턴포스터는 썼다. 카토는 숭고한 대의를 이루기 위해서 단 한 명의 걸출한 지도자가 모든 그룹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조지 마이클은 자신의 책에서 리더십에 대해 카토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인용했다. “다른 조직들과 (협상을 통해) 연대ㆍ결합하려 해서는 안 되고 상대 조직원들을 훔쳐와야 한다. 그(히틀러)는 어떤 단체와도 합병하지 않았다. 웅변가로서, 또 지도자로서, 그는 오직 자신의 역량만으로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자 당을 만들었다.”(Counter-currents, 재인용)
말년의 카토가 미국의 이란ㆍ이라크 전쟁에 대해 격렬하게 비난한 글들은 일부만 떼어놓고 보면 노엄 촘스키가 썼나 싶을 정도였다. 2007년 ‘American Free Press’ 칼럼에서 그는 이라크 전쟁으로 “8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을 이스라엘을 추종하는 “집단 학살의 광신자들”이라고 썼다.
그는 미국 포퓰리즘의 영웅들을 소개한 ‘포퓰리즘 V.S 금권주의: 보편의 전쟁(96)’이라는 책을 엮었고, 편집자 소개란에 자신을 제퍼슨주의자이자 대중주의자(populist)라고 밝혔다. ‘American Free Press’의 10월 30일자 그의 부고 기사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애국자 가운데 한 명인 윌리스 카토가 10월 26일 버지니아 주 자택에서 평화롭게 별세했다. 지난 50여 년 동안 고인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일깨우기 위해 그 누구도 혼자 해낼 수 없을 엄청난 일들을 해냈다 ”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카토의 뒤를 이을 누군가가 있다면- 있겠지만- 저 책의 증보판에는 그의 챕터도 수록될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