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는 국내 최강 면세점업체다. 아시아에서 1위,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3위에 올라 있다. 문제점도 많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면세 비즈니스를 가장 잘 하는 기업임은 확실하다. 반면 두산은 면세점을 해본 경험이 없다. 그룹 사업구조를 중후장대형으로 전면 전환한 90년대 말 이후로는 소비재나 서비스업 쪽에 아예 손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면세점 대결에서 두산이 이겼고 롯데는 졌다. 새 면세매장을 허가하는 신규특허(면허)였다면 그럴 수도 있다. 국내 시장에서 롯데의 독주가 워낙 심하니까, 유망한 기업을 신규로 진입시켜 경쟁자로 키우는 건 괜찮은 선택이다. 실제로 지난 여름 서울지역 면세점 신규허가 때엔 한화가 첫 티켓을 따냈다. 가격 입찰이었더라도 그런 결과는 가능하다. 아무리 경험 없는 후발주자라도 압도적으로 많은 금액을 써내면 1등을 제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결은 정책적 고려가 개입되어야 할 신규 특허도 아니고, 돈으로 싸우는 가격경쟁입찰도 아니었다. 롯데가 이미 갖고 있는 시내 면세매장(잠실)의 5년 특허기간이 만료돼 갱신여부를 정하는, 희망자 가운데 누가 더 면세점을 잘 운영할 것 같은가를 가리면 되는 아주 심플한 심사였다. 롯데와 두산이 낸 제안서 상세내용은 잘 모르지만, 35년 역사의 국내 1위 면세업체와 면세점 경험이 전무한 업체 중에 누가 면세점 경영을 더 잘 할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뻔했다. 그냥 골리앗이 다윗을 이기는 게 정상인 게임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롯데가 진 이유는 딱 하나다. 형제의 난.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서로 물어뜯는 막장 싸움을 벌인 것에 대한 정서적 단죄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롯데가 면세점 특허를 잃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다. 그간의 행태를 보면 고소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서와 정책은 별개다. 대다수 국민들이 롯데를 욕한다고 해서 그걸 정책에 반영하는 건 곤란하다. 롯데 일가의 피보다도 진한 돈 싸움은 당연히 비난 받아야 하고, 법을 위반한 게 있다면 그 역시 의당 처벌받아야 하겠지만, 면세점 갱신여부는 오로지 롯데의 운영능력과 경영성과로 판단했어야 했다. 정부가 특정사업 인허가권을 이런 용도로 휘두른다면, 기업은 권력 앞에서 또다시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기득권 배제는 더 큰 문제다. ‘기득권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얼핏 공정한 정책처럼 들리지만 천만에 말씀. 롯데가 지금까지 잠실면세점에 쏟아 부은 돈은 족히 수백억원은 될 것이다. 이번 심사에서 단 하나 있던 면세점(워커힐)마저 빼앗기게 된 SK도 20년 넘게 매장을 운영하면서 천문학적 금액을 투자했다. 그만큼 돈을 번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를 통해 우리나라 관광산업이 커지고 고용과 내수도 함께 성장한 걸 부인할 수는 없다.
동네가게에도 권리금이란 게 있다. 그 동안 들인 투자와 노력의 대가, 즉 기득권은 법적으로도 인정되는 게 상거래 장치다. 하지만 면세점은 아무리 잘 했어도, 얼마를 투자했어도, 정부 심사에서 탈락하면 권리금은커녕 어디서도 대체 매장을 낼 수 없다. 불과 5년 뒤 사업지속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황에서 대체 어떤 기업이 투자를 하고 마케팅을 할 까. 잘 나가던 면세점이 갑자기 사라지고, 새로 생겼다가 5년 뒤에 또 사라지고, 이런 이상한 면세시장을 외국인 큰손 관광객들은 어떻게 생각할 까.
2년 뒤면 롯데의 코엑스면세점 특허기간이 만료된다. 롯데는 더 이상 빼앗기지 않으려고 사활을 걸 것이고, 단 한 개 매장조차 없어진 SK는 더 필사적으로 달려들 것이다. 두산, 한화, 신세계 등은 그들대로 규모확대를 위해 또 다시 승부수를 띄울 것이다. 신난 건 칼자루를 쥔 정부뿐. 기업들의 영업안정성이 없는데 면세산업, 관광산업이 발전할 리 없다.
정부는 더 이상 면세점으로 기업들을 쥐락펴락해선 안 된다. 이럴 바에야 아예 특허제도를 없애 죽든지 살든지 합치든지 기업들끼리 알아서 하는 게 낫다. 그게 어렵다면 신규 특허를 더 확대하고, 기존 면세점은 큰 문제가 없는 한 갱신해주는 게 맞다고 본다.
이성철 국차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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