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전반기 부터 말기에 걸쳐 제작된 푸른 빛의 자기를 '고려청자'라고 말한다. 보통 철분이 약간 함유된 태토에 장석질의 유약을 입혀 구워낸 청자로 우리민족이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 이 고려청자도 그 당시 한·중문화교류의 산물로 보면 될듯하다. 고려청자의 제작은 10세기 중국월주요의 도공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중국 송대의 대표적 자기인 여요, 요주요, 자주요, 경덕진요, 건요 등이 개성상인들의 활발한 무역으로 국내에 들어오면서 고려청자의 형태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원의 교류는 군사적 침공과 뒤이은 지배·복속의 정치적 예속을 축으로 형성됐다. 당연히 호혜적 무역보다 고려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조공무역의 형태가 일방적인 모습이었다.
13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었던 만큼 원과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 도자분야에 있어서 양국 도자의 문양과 기형을 비교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려청자의 문양으로 살펴보면 능화형 창의 배치와 파도무늬·용무늬·물고기무늬·쌍봉무늬·보상당초무늬가 있다. 기형상으로는 편병과 화금자기·각접시 등과 철유·흑유자기 등이 원나라의 영향으로 등장한 새로운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 충렬왕 15년(1289)에 제주 안찰사가 원의 중서성에서 청사로 된 옹·분·병을 구한다는 공문이 있어 원에서 청자 구입이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충렬왕20년 (1294) 4월과 충렬왕22년(1296) 11월에는 원 성종에게 바쳤던 선물과 공물 내역에 호병, 즉 호리병이라는 몽고 양식의 그릇이 있어 도자기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널리 알려진 화금자기의 경우 조인구(1237∼1308)가 원 세조에게 화금자기를 진헌하자 자기에 그림을 그리지 말고 진상도 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1297년 원 성종(1295∼1307)기에 다시 금채자기가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에서는 원 황제에게 진상하는 화금자기에 신경 쓴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출토 원대 도자로는 원주 원향사지 출토 음각과 압출각문 백자, 남양주 수종사 부도출토 청자주름문호를 들 수 있으며 북한 자강도 희천시 서문동 청백자인 화쌍어파문반이 출토되었다. 중국에서는 비슷한 제품이 원대 경덕진과 용천 금촌요지에서 출토되었다.
국내 출토 원대 도자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신안선에서 인양된 해저 유물이다. 출토도자의 대부분은 용천청자이며 고려청자와 남송관요도 일부 발견되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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