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헌의 구례일기 33] 서울 가서 목소리 내기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날 축축헌디 뭐 허는가?” 장씨 아저씨가 기척도 없이 농장으로 들어오셨다. 꺾어 말리던 콩을 뒤집고 비닐 덮개를 다시 여미던 참이었다. 이맘때 일은 거두고 말리는 게 전부인데, 변덕 심한 하늘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덮었다 펼쳤다를 반복했다. “아저씨 환장하겠네요. 노고단 쪽은 하늘이 파란데 왜 여기만 안개비가 온대요?” 아저씨는 콩깍지를 까서 콩을 손에 놓고 살펴보셨다. “내가 하느님이랑 친한 줄 아는가? 왜 나한테 따진댜. 나도 그 냥반이랑 진즉 연락 끊어져서 잘 몰러.” 아저씨는 농막으로 앞장 서셨다. “게으른 놈 농사짓기 딱 좋은 날씬게 걍 놀아.” 아저씨를 따라 들어갔다. 막대커피가 없어서 이 동네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레시피로 타드렸다. 커피 반 스푼, 설탕 세 스푼. 커피 맛 설탕물인 셈인데 “맛나네” 하셨다. 막걸리 리액션처럼 입술을 훔쳐내시고는 물으셨다. “서울은 잘 댕겨 왔는가?” 지난 14일 주말, 서울에서 열린 대규모 농민대회를 말씀하시는 거다.
그날 아침 날씨도 이랬다. 우산 쓰자니 거추장스럽고 안 쓰자니 모자 하나는 적시기엔 충분했다. ‘가야 하나?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왔다 갔다 했다. 할 일이 뒷동산만큼 남아서도 그랬지만, 아직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놈이 농민 흉내만 내는 것 같아 머리띠 묶을 일이 부끄러웠다. “형님, 비도 온다 하고 버스 자리도 남을 것 같다는데 바람 한번 쐬고 오시지라.” 오락가락하던 마음은 D동생의 추임새에 홀라당 넘어가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종합세트였다. 농민, 공무원, 교사, 국악인, 실업청년, 귀농귀촌자 까지, 말하자면 잡곡 버스였다. 제주 강정마을에서 지인을 찾아 왔던 분도 함께 뒷자석에 앉아 귤 농사도 점점 힘들어진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고 한마디씩 했다. “농산물값 제대로 받아 갖고 군수 애쓴다고 밥도 사주고 군 의원 고생한다고 술도 사주고 그랬으면 좋겠구만 맘대로 안되네요” 하는 훈훈한 얘기부터, “아, 어제까지 철석같이 버스 탄다고 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면 되겄는가. 비 오는디 집에서 뭐 할겨. 늦둥이 볼랑가?” 하는 원망까지 다양한 말씀이 이어졌다. 교사는 선생님의 품위를 지켰고, 읍 사무소 직원은 발언도 성실히 하려고 애썼다. 나도 간단히 자기소개 했더니 사방에서 의아해했다. “아 서울사람이었어? 난 애초부터 구례사람인지 알았구마.” 인사로 알아들었다. 버스에 무지개 빛 조명은 있었지만 춤은 없었고 적당량의 술이 종이컵을 타고 돌았다. 두어 시간 떠들썩한 친화의 시간이 지났고, 두어 시간 고요한 취침이 이어졌다. 한참을 그러고도 서울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따 뭣땀시 이리 막힌댜!” “뭐는 뭐여 우리 겉은 사람 땜시 이러지!” 큰 뜻 없이 흐르던 소모성 탄식도 기운이 딸리는지 조용해졌다. 남산 3호 터널을 들어서는데 한 어르신이 물었다. “서울에 이렇게 긴 터널이 있당가?” 터널에서만 30분 넘게 기어갔다. 어렵게 출구에 닿자 침침한 하늘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 없었다. 걷는 게 낫겠다 싶어 모두들 터널 앞에 내렸다. 아침 먹고 출발했는데 버스에서 내리니 금방 어두워지게 생겼다. 평소 3시간 걸리던 길을 8시간 만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머리띠를 매고 집회 의상으로 준비한 나락포대를 뒤집어쓰며 우비를 대신했다. 신세계백화점 분수대 앞에 다다른 대열은 잠시 우왕좌왕하더니 용케 지하도로 들어갔다. 일단 들어갔지만 사람들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다시 헤맸다. 회사 다니던 시절, 명동 쪽으로 자장면 먹으러 다니던 길이었는데 이젠 그 자리에 머리띠에 포대 숄을 하고 나타날 줄은 나도 몰랐다. 잘 아는 길이라 출구를 안내하고 앞장섰다. 한국은행 담을 따라 조금 걸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구호 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다 생각하니 걸음도 빨라진다. 갑자기 옆에 있던 D동생이 감탄사를 토했다. “흐미~” 하더니 길가에 은행잎을 쓸어모은 대형비닐봉투를 가리켰다. “형님! 저거 포대째 실어다 밭에 뿌리면 좋겄구마요. 은행잎이 살균효과가 있어서 좋잖애요!” 누가 촌놈 아니랄까 봐 천상...
시청 앞에서 이리저리 본 대열을 찾던 사람들이 남대문 방향으로 움직였다. 농민들은 그곳에 따로 모여 있다고 했다. 비를 맞으며 걷는 어르신들은 벌써 지쳐 보였다. “밥.쌀.수.입.반.대”라고 크게 적힌 글자판을 보니 환영 받는 느낌이 들어 힘이 났다. 그것도 잠시, 겨우 도착했다 싶었는데 바로 행진 시작이란다. 비상식량으로 챙겼던 머리고기에 소주 한 모금씩 나눠 먹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서 있는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다봤다. 갈 길 바쁜 분들일 테니 시선이 곱지 않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조금만 이해해주세요’ 하는 슈렉 고양이 표정을 지으려고 애썼다. 앞사람 등짝만 보고 걷다 보니 다시 아까 그 분수대 앞이다. 조용히 가시던 어르신들이 한 두 마디씩 했다. “여가 아까 거그 아녀?” “아이고, 다리 뿌러지겄구마.” “내일 비 그치면 콩 타작도 해야 허고 헌게 인제 그만 가세.” 농민회 임원들도 모여서 얘기를 나눴고 어쩔 수 없이 모두 버스에 타기로 했다. 8시간의 버스 상경, 2시간 도보 행진, 그리고 하행 길. 농민회의 공식 일정은 거기까지였다. 준비하느라 애썼던 간부들은 허탈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올라오는 버스에서 마이크 잡고 울분 토하고, 소주 한 잔에 헛웃음 짓는 것으로 원했던 위로를 다 얻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남아있기로 한 몇 명과 서울광장으로 이동했다. 흡사 전쟁터다. 차 벽을 이겨보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이겨내려는 경찰들은 모두 혼이 빠져 있었다. 인도까지 뿌려대는 캡사이신 물대포에 사람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넘어졌다. 내 몸은 천만금처럼 움직여지질 않았다. 지켜보는 것만으로 힘들었다. 매워서가 아니었다. 그냥 마음이 몸보다 무거웠다. 죽기살기로 몸 던지는 사람들이 벌이는 한 판의 굿을 보는 심정이었다. 한 맺힌 사람들과 애꿎은 경찰들이 성냥과 성냥갑처럼 부딪혔다. 이내 불이 붙었고 희생자가 나왔다.
나중에 ‘누군가는 총이라도 쏴서 시위대를 막아야 한다’고 했고 ‘누구는 시위대를 테러범에 비유했고, 누구는 시위대가 농민을 폭행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 ‘누구’라는 사람들 땜에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사달이 난 것인데, 정작 그들은 지들끼리 입에 못 담을 말로 질 낮은 쌈박질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입에 다시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있다. 싸우다 만나 웃으며 악수하고 같이 밥 먹고 또 싸우고. 진정한 ‘전문 싸움꾼’이다. 발길을 돌렸다.
“그려 시위하니 뭐 좀 나아지겄는가?” 장씨 아저씨가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 물었다. “뭐 나아지겠어요? 그냥 한번 큰소리 치고 올라고 간 거죠.” “뭐 외칠라고 했는가.”“그냥 밥쌀 수입반대랑 농업진흥청에서 하는 GM쌀 개발 반대 뭐 그런 거죠.” “그래 제대로 소리 좀 지르고 왔어?” “외치는 게 문제가 아니라 하나도 얘기가 안되니 문제죠.” 아저씨는 잠시 질문 공세를 멈추시더니 말씀하셨다. “잘 혔어. 그렇게 모이기라도 하고 그래야 알아주지. 다치는 사람이 나오니께 문제지.” 일장 연설이 이어졌다. “근디 주인도 없었다면서 청와대 가믄 뭐 하겄는가. 가서 불이라도 지르겄는가? 그리고 경찰도 그랴. 시위 허는 사람덜이 진심으로 청와대 갈라고 맘 먹으면 그거 못 가겄는가? 촌놈인 나도 골목으로 빠져 나가서 가겄구만. 다덜 모자라서 그랴.” 말대꾸처럼 얘기했다. “우리 애들이라도 나중에 좀 좋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저씨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높이셨다. “걔덜 걱정 말어. 걔네덜은 걔 네가 알아서 헐 것잉게 우덜 먹구 살 걱정이나 허고 살어! 저 콩 어쩔겨. 비는 계속 온다는디...” 아저씨는 마치 화가 난 것처럼 휙 돌아 나가셨다. 뭐땜에 화가 나신 걸까.
콩밭에 습기가 가신 것 같아 낫 챙겨 콩밭으로 나갔다. 헌데 산까치 수 십 마리가 편대를 갖추고 우리 농장을 동서로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왜 난린가’ 보니 미처 따지 못한 장씨아저씨 감나무를 공격하고 있었다. 비 그친 아침이라 본격적인 먹이 찾기에 나선 것이다. 그냥 앉아서 먹으면 될 텐데 먹다 말고 식구들 부르러 가는 건지 숫자가 점점 불어났다. 무시하고 내 일보러 콩밭으로 들어가는데 지들 공격하는지 알고 위협 비행을 하며 똥을 싸재꼈다. 낫 들고 있는 폼이 무서웠나 보다. 이리 저리 피했지만 그 중 한 놈의 배설물이 목덜미를 때렸다. 뭘 쳐먹었는지 흰색, 노란색, 검정색이 섞인 놈의 냄새가 사람 것보다 심했다.
전화벨이 울린다. 풀에 대강 손을 문질러 닦고 손가락 끝을 세워 폴더를 열었다. “네 여긴 평창올림픽 홍보실인데요” 목소리도 예쁜 여자가 공기 반 소리 반 다정한 음성으로 대답도 안 듣고 안내를 시작했다. “올림픽 홍보를 위해 다른 정보 필요 없이 직장 주소만 알려주시면 아무데서나 이용하실 수 있는 콘도 이용권을 드리고 있으세요.” 누굴 높이는 말인지 모를 말을 덧붙인다.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시간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목소리였다. “농사짓는데요.” 그녀의 댓 말은 바로 나왔다. “나 참 재수...” 상냥함은 날아갔고 목소리는 끊어졌다.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한다기에 나름 친절하고 간단하게 해준 대답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더 큰 실례를 저지르게 했다. 내가 그렇게 나쁜 짓을 하며 살고 있는 걸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선재아빠, 농장인가요?” 우리 집 수호천사인 간전댁할머니셨다. “일어나 봉께로 정신도 말짱허니 들깨 생각도 나고...” 할머니 특유의 돌려 치기 화법이다. 이쪽 대답이나 질문을 비껴가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는 방법이다. “할머니 거...” 말을 끊고 말씀을 이으신다. “엊그제꺼정 무르팍이 아프고, 어제는 날도 꾸물꾸물하더니 오늘은 이도 저도 참 좋네요. 선재네 들깨나 털러 가고자픈디 나 좀 델러 오세요. 웬만허면 걸어 가겄는디...” 최근 몸도 안 좋으셨고 연세도 연세인지라 단호하게 할머니의 농장 출입을 막아왔던 터였다. 그런데 당신이 얼결에 자백하신 대로 걷기 힘들만큼 다리가 편찮으신데도 깨를 타작하러 오시겠다는 말씀이다. “할머니, 오후에 또 비 온대요. 잘 덮어 놨으니까 날 더 좋아지면 꼭 전화 드릴게요.” 할머니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한방 때리신다. “선재아빠 그거 혼자 다 못 혀요...” 내 너를 잘 알고 있으니 잠자코 말 들어라 하시는 거다. 맘 속으로 나도 자백을 하고 있었다. ‘예 할머니, 힘 드네요. 할머니가 계시면 참 좋겠네요.’ 맘과 달리 거짓 대답이 나갔다. “걱정 마세요. 저 이제 잘 해요...” 잘하긴 개뿔, 야무지게 하는 일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치고 산다. 먼 길 올라가서 목소리 한 번 크게 못 지르고 온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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