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이 컸다. 팬들의 반발도 있었다. 무너져가는 명가가 고심 끝에 악수를 뒀다는 반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장수 영화 시리즈 ‘007’의 영웅 제임스 본드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화난 듯 다부진 얼굴부터가 거부감을 불렀다.
돌아보자. 전통적으로 본드는 근사한 외모의 난봉꾼으로 20세기 마초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켰다. 능글능글한 웃음과 기름기 잔뜩 밴 화술로 미녀들을 단번에 꼬드겼다. 첨단 자동차와 비밀 무기 등으로 적을 제압했으나 마지막 비장의 무기는 여자들의 협력이었다. 1대 본드 숀 코넬리가 바람둥이 첩보원의 초석을 다졌고 3대 본드 로저 무어가 멋쟁이 007 이미지를 든든히 구축했다. 각진 얼굴이 인상적인 4대 본드 티모시 달튼이 단 두 편에 출연하며 단명에 그친 것도 선배들이 쌓아놓은 미끈한 이미지를 넘어서지 못해서다. TV드라마 ‘레밍턴 스틸’로 넉살 좋은 미남 인상을 만들어낸 5대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이 적통으로 여겨진 이유이기도 했다
크레이그의 6대 본드 발탁은 그래서 여러 모로 우려를 샀다. 2006년 ‘카지노 로얄’로 007 데뷔식을 치렀을 때, 꽉 조이는 짧은 수영복을 입고 근육을 자랑하며 등장하는 장면부터 반감을 샀다. 크레이그는 대형 상업영화 주연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간 맡은 역할도 본드와 비슷한 면모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었다. 저예산영화 ‘마더’(2005)에선 애인의 나이든 엄마와 사랑에 빠지는 목수였고, ‘로드 투 퍼디션’(2002)에선 암흑가 두목의 우둔한 아들이었다. 실화에 바탕을 둔 첩보영화 ‘뮌헨’(2006)에서도 다혈질로 동료를 곤경에 빠트리는 이스라엘 첩보원을 맡았다. 대부분 말이나 두뇌회전보다 주먹과 행동이 앞서는 역할이었다. 영국 공업도시 리버풀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노동자 이미지를 강화했다. 앞선 본드와 달리 파란 눈도 생경했다.
그러나 ‘퀀텀 오브 솔라스’(2008)를 거치며 대중은 몸으로 말하는 본드에 적응했다. 크레이그표 본드가 진가를 발휘한 것은 ‘스카이폴’(2012)에서다. 임무 때문에 연인과 지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번뇌하고 자신의 지워진 과거에 대해 고민하는 어두운 본드가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사랑에 순정을 바치는 무뚝뚝한 모습이 여성 관객의 마음을 샀다.
되돌아 보면 크레이그의 등장은 시대의 요청이었다. 동서 대결을 극적 동력으로 삼았던 20세기 본드는 명확한 선악구분의 맹점을 보완하기 위해 호객용 유머와 근사한 미소가 필요했다. 냉전체제가 해체되고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해야 하는 시대엔 오히려 말없이 구르고 달리고 뛰며 관객을 설득하는 본드가 더 설득력 있다.
무어 이후 본드로 가장 오래 살고 있는 크레이그도 ‘은퇴’가 거론된다. 상영 중인 ‘스펙터’의 마무리는 그의 퇴장을 암시한다. 권총을 던진 뒤 연인의 손을 잡는 본드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007’시리즈의 새 장을 기대할 수 있다. ‘007’시리즈의 본거지 영국에서는 이미 다음 본드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다.
크레이그는 “‘007’시리즈에 적어도 한 번 더 출연하기로 계약을 했다”며 하차를 완강하게 부인하나 계약 변동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최근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이드리스 앨버와 톰 하디, 톰 히들스턴 등을 다음 본드로 거론하고 온라인 여론조사를 진행 중이다. 슈퍼맨을 연기했던 헨리 카빌이 26%의 지지를 얻으며 크레이그(23%)를 앞서고 있다. 본드라는 수식을 얻게 된 지 10년. “본드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다”는 크레이그도 시대에 밀려 내리막길에 들어섰다.
라제기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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