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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입력
2015.11.1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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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이라는 단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방송에서는 여행가기 좋은 곳을 그렇게 떠들어대건만 며칠의 일정은커녕 짧은 마음의 여유조차 내지 못할 때. 몇 해고 지난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가 발견될 때, 그곳에 쓰였으되, “이놈아 너의 소행이 내게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가져 오게 했는가…”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던가? 내 뜻대로 전공을 정한 일, 아버지의 시국관을 따지고 몰아세운 일, 이제는 벌써 그 많은 죄상을 기억 속에 찾을 바 없되, 그러나 아버지는 그 때문에 애를 태우신 것이다.

백석의 시, 그 너무나 곱고 명징한 우리말의 품격. 표절 안 했다고 우기는 소설가와 출판사. 훈장처럼 달고 있으나 이제는 아무도 거들 떠 보지 않게 된 운동권 경력. 성공한 아니 성공한 것으로 착각하는 옛 친구를 만날 때. 그리하여 그가 이제는 잘 나가는 투자가요, 혹은 임대업자로서 우리가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나 주물럭대는 초라한 인문학 전공자밖에 못되었다는 이유에서, 우리에게 손을 주기는 하나 벌써 우리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것같이 보일 때. 피트니스 클럽에서 내려다보는 건강한 다리들.

삼포세대, 비정규직, 사오정, 오륙도, 일베와 좌빨 그리고 금수저, 흙수저라는 낱말. 임산부 보호석에 당당히 앉아 있는 건강한 중년들. 연말의 향우회와 동창회. 나이 먹은 게 자랑인 노인들. 수능시험 다음 날. 꺾일 줄 모르는 집 값. 4살 어린이가 주택 수십 채, 16살이 수백 채 집을 갖고 있다는 기사. 줄지 않는 마이너스 통장. 유쾌하고 사랑으로 가득 찬 가족드라마. 밝고 명랑한 대부업 광고. 장기매매를 알선하는 역전 화장실의 스티커. 길바닥에 널린 출장안마 전단지. 첫 길인 어느 소도시 허름한 곳에서의 하룻밤. 창가에 불빛이 번쩍이다, 옆방 문이 열리고, 수상쩍은 대화가 오가더니, 여인의 교성과 삐걱이는 침대소리가 들릴 때 당신은 난데없는 애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아직도 젊음과 전성기의 매력을 가진 양 착각하고 교태 어린 웃음을 짓는 한물간 여배우의 성형에 찌든 얼굴. 엘리베이터 앞을 막아 선 사람들, 내리기도 전에 밀치고 들어오는 지하철 승객들. 옆 좌석 승객의 길고 긴 핸드폰 통화, 그래서 조금도 알고 싶지 않은 그자의 시시콜콜한 잡사를 끝없이 들어야 할 때. 마카다미아. 갑질 하는 고객 앞에 무릎 꿇은 백화점 직원들. 불친절한 식당. 밤거리 하늘에 점점이 떠있는 네온 십자가. 대형차에서 내리는 출세한 사람들의 부녀자의 넓은 어깨. 동남아 갔다 와서 우리 국력의 신장이 자랑스럽다고 희번덕거리며 얘기하는 동료. 복권가게에 붙어 있는 당첨자 플래카드.

그러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어찌 이뿐이랴! 터키 해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아이. 차별과 분노, IS와 테러.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하고 찍은 사냥꾼의 자랑스러운 포즈. 가습기 살균제 피해 소송. 4대강과 세월호. 쌍용차 복직투쟁위원회, 1억 원 배상 판결을 받은 전 KTX 여승무원들의 심란한 얼굴. 정신대 할머니의 주름진 손. 북에서 돌아온 남편이 행여 찾지 못할까 봐 이사도 안 갔다는 팔순 넘은 새색시의 고운 한복. 라이따이한, 코피노라 불리는 사람들. 애국가와 국정교과서. 초겨울 시위대와 물대포. 노는 아이들이 없어 텅 빈 놀이터. 힘들 때면 꾸는 입대하는 꿈. 입대한지 1년이 못되어 떠나간 여인의 소식. 오래 전 헤어진 여인이 아직도 혼자 살고 있다는 누군가의 전언. 계통 없이 처먹고 난 다음 날, 널브러진 잔해 속에서 오늘 할 일이 많음을 기억에서 끄집어 올렸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때.

순수의 밀실에서 고운 이의 머리카락을 언제까지나 희롱하고픈 나이에 현실의 광장이 너무도 어지러운 것이 그리하여 부드러운 어깨를 밀어내고 달려가야만 하는 시대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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