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짐한 양에 저렴한 가격”
PB상품으로 경쟁사와 차별화
도시락, 라면 벗어나 제과, 음료 확장
1, 2인 가구 늘며 수요 커져
SNS 다채로운 평가로 폭발적 반응
유명템 구하러 편의점 순례도
먹고 있노라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음식들이 있다. 이를테면 눅눅한 김 안에 들어 있는 찬밥 속에 식재료라고는 단무지 말고 찾을 도리가 없는 김밥이라든가, 달랑 한 장 들어있는 양상추의 물기도 이기지 못하고 납작하게 숨이 죽어 있는 샌드위치 같은 것들. 주로 편의점에서 사먹었던 기억이 싸늘하게 되살아나는 이 음식들은 성공한 벤처기업가가 와서 먹더라도 실패한 인생 같은 기분을 떨치기 어려울 것이다.
편의점 음식에 대한 이 악의적인 평가는 그러나 시효 만료를 앞두고 있다. 최근 편의점 매대 위의 음식들을 일람하거나 시식해본 적이 있다면, 편의점 음식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삐 한끼를 때우는 음식에서 탈피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최고의 용례로 빈번히 호출되고 있는 편의점 음식. 그 진화의 좌표는 어디쯤일까.
국내 대표적 편의점 세 곳의 ‘유명템’(유명한 아이템)들을 직접 먹어봤다. 대단한 미식이라고는 물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일말의 식도락은 누릴 수 있었다. 3,900원짜리 도시락에서 식도락이라니. 어느 블로거의 시식후기를 인용해보자. “그래 봐야 편의점 음식이지 하고 우습게 봤는데, 우습게 본 제 자신이 우스워지네요.”
‘마더혜레사’, 편의점 식도락의 기원
편의점 음식이 도저히 못 먹을 음식에서 꽤 괜찮은 한끼 식사로 진화하기 시작한 기점은 김혜자 도시락(GS25)이 출시된 2010년이다. 편의점 음식의 역사에서 프랑스혁명에 해당하는 김혜자 도시락은 나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해온 선대의 수많은 편의점 도시락들과는 달리 3,900원이라는 가격을 믿을 수 없는 알찬 구성과 맛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사업이 어려워진 김혜자씨의 아들이 도시락을 출시하면서 엄마 이름 좀 쓰면 안 되겠냐고 통사정을 하자 “엄마 이름에 먹칠 하지 말고 제대로 만들라”고 해 나왔다는 터무니없는 낭설까지 돌 정도였다. 밥을 아래층에 깔고 돈까스 같은 메인요리와 피클, 샐러드, 계란말이 등 실한 밑반찬을 위층에 담은 이 2단 도시락은 서서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해 2013년 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폭발적 반응을 얻으며, ‘마더 혜레사’ ‘혜자롭다’(가격은 싼데 품질은 뛰어나다) ‘갓혜자’ 같은 신조어를 낳았다. 이후 모든 편의점들이 ‘푸짐한 양에 저렴한 가격’을 모토로 잇따라 도시락을 출시하면서, 편의점간 ‘PB(Private Brand) 상품 전쟁’이 시작됐다.
편의점들은 새우깡이나 신라면처럼 어느 유통소매점에서 살 수 있는 NB(National Brand) 상품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꾀하기 어렵다. 그래서 최근 몇 년 새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충성도 높은 단골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PB상품을 출시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가장 적극적으로 PB전략을 취하고 있는 GS25의 경우, 2010년 31.2%였던 PB상품의 비율이 올 10월 현재 36.1%까지 늘어났다. 2010년 PB상품의 비율이 18.6%에 불과했던 세븐일레븐 역시 올해 3분기까지 그 비율이 31.9%로 급증했다.
혜리도시락, 오모리 김치찌개 라면, 바지락 칼국수 등 도시락과 라면분야에서 주로 이뤄졌던 PB식품은 최근 들어 무한대에 가깝게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전국의 맛집을 편의점 안으로 들여오겠다는 각오로 속초홍게라면, 통영굴매생이라면, 강릉교동반점 같은 제품들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고르곤졸라피자, 죠스떡볶이, 언양식 불고기 김밥, 닭다리구이 등 음식의 국적과 장르에도 제한이 없을 뿐 아니라 마카롱이나 치즈케이크, 햄&에그 크로아상 샌드위치, 바나나푸딩 등 디저트 카페에서나 먹을 수 있던 제과류까지 매대 위에 올라가고 있다. 대만 밀크티, 민트탄산수, 자몽티 등 음료 분야에서도 잇따라 히트상품이 터지고 있는 중. ‘그 편의점’에 가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싸고 맛난 음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건 꼭 먹어야 해’… SNS가 키운 유명템들
내용은 ‘오지게’ 충실하면서 가격은 저렴한 음식으로 그 정의가 변화하고 있는 편의점 PB식품은 1, 2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세와 맞물려 폭발적 수요를 창출했다. GS리테일 송완섭 차장은 “차별화 상품이 간절한 편의점 체인과 유통망이 없어 고전해온 전국의 맛집ㆍ중소기업의 필요가 만나 다양한 PB식품이 탄생했지만, SNS 이전에는 인지도를 높일 방법이 광고 외에는 없었다”며 “SNS 덕분에 매출액 순위에서 NB 상품을 제치고 1위에 오르는 PB상품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GS25의 버터갈릭맛 팝콘은 새우깡을 제치고 편의점 내 매출액 1위 과자에 오르고, 라벨리 팥빙수와 망고빙수는 메로나를 밀어내고 빙과류 1위를 차지했다. 음식에 대한 평가가 가감 없이 펼쳐지는 SNS가 201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 편의점대전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것. 주례사비평과 스폰서협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고객들의 예봉은 ‘돈 주고는 못 먹을 맛’ ‘오지게 알찬 구성’ ‘공짜로 줘도 못 먹을 맛’ ‘편의점에서 먹는다는 것 자체가 축복’ 등으로 다채롭게 음식을 묘사하며 시식 후기 붐을 일으키고, SNS에서 극찬을 받은 음식은 ‘유명템’으로 등극하며 그 음식을 맛보기 위해 반드시 편의점을 찾아가게 만드는 팬덤현상까지 만들고 있다. GS25의 오모리김치찌개라면, 언양식 불고기 김밥, 죠스떡볶이, 세븐일레븐의 혜리도시락, 강릉교동반점짬뽕, CU의 자이언트 피자, 오다리치즈라면, 빅요구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각각의 편의점을 순례하며 구입한 ‘유명템’들로 손님을 초대해 식탁을 차리는 젊은이들도 있다. 그들이 올려놓은 인스타그램의 사진이나 블로그를 보면, 킨포크스타일 부럽지 않은 행복의 기운이 넘친다. 대학생 임소연(23)씨는 “각각의 편의점에서 사온 여러 음식들을 조합해 요리하는 레시피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다”며 “불닭볶음면과 참치마요 삼각김밥, 치즈를 섞어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다든가 CU우유빙수에 오레오 과자를 잘게 부숴 섞어먹는 걸 자주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돈 내고 기분 나빠지는 어설픈 식당음식보다 맛있으면서도 품목당 4,000원을 넘기는 일이 거의 없는 이 착한 음식들은 저성장시대가 선사한 ‘N포세대를 위한 식도락’인 셈이다. 그런데 편의점 음식이 이토록 훌륭한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아닐까.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박규희 인턴기자(성신여대 국문과 4년)
유해린 인턴기자(이화여대 국문과 4년)
◆ 직접 먹어보니
-콤비네이션피자(CU, 5,900원)
: 오븐에 구워주는 냉동피자. 도우가 약간 과자느낌이지만, 조리음식의 느낌이 난다. 동네피자가게가 문 닫았는데, 꼭 피자가 먹고 싶을 때 먹을 만한 맛.
-통영굴매생이라면(CU, 1,500원)
실제 라면 위로 매생이가 떠다닐 정도로 건더기가 실하다. 굴 비린내를 예상했으나 시원하고 맛있다. 굴맛도 살짝 혀끝에 스친다.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CU, 1,800원)
: 해물, 건새우, 당근 등 기존 컵라면에서 볼 수 없던 커다란 건더기가 위용을 자랑한다. 국물맛이 시원하고 면은 쫄깃하다. 어설픈 칼국수 식당보다 훌륭한 맛으로 10점 만점에 10점.
-오모리 김치찌개 라면(GS25, 1,500원)
: 3년 이상 숙성한 묵은지를 이용해 김치찌개를 만드는 김치찌개 전문점 오모리와 제휴해 만든 라면. 라면스프와 특제소스에 절인 생김치가 들어있어 실제 김치찌개와 비슷한 맛이 난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어 깊은 맛은 덜한데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이런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혜리 7찬 도시락(세븐일레븐, 3,900원)
: 볶음김치, 닭다리 한 개, 시금치나물, 제육볶음, 비엔나소시지, 어묵볶음, 계란말이가 들어있다. 밥도 건강에 좋은 흑미. 전자레인지에 1분가량 돌린 후 따뜻하게 먹으니 웬만한 도시락식당이 안 부럽다.
-죠스떡볶이(GS25, 2,500원)
: 유명 떡볶이체인 죠스떡볶이를 그대로 편의점에 들여왔다. 순대와 떡볶이가 함께 들어있는 ‘떡순이’인데, 어묵과 양배추 건더기도 들어있다. 떡의 질감이 아쉽다는 점만 빼면 죠스 본점의 맛과 큰 차이가 없다.
-언양식 불고기 김밥(GS25, 1,500원)
: ‘바르다 김선생’식 프리미엄 김밥이 부럽지 않다. 고기가 김밥 원의 절반에 육박한다. 이걸 1,500원에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축복.
-바나나푸딩(GS25, 3,000원)
: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처음 들어와 난리가 났던 ‘섹스 앤 더 시티’의 바로 그 푸딩. 뉴욕의 디저트카페 매그놀리아의 맛을 떠올린다면 실망이 클 것.
-떠먹는 고르곤졸라 피자(GS25, 2,800원)
: 핫케이크를 도우로 쓴 컵피자. 편의점 음식의 기본 미각인 ‘단짠단짠’(달고 짜고 달고 짜고)을 그대로 구현한 달면서 짠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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