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신문사 경제부장이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이 칼럼은 경제 관련 이야기를 풀어놓는 게 당연하다. 지금까지 대체로 그래왔다.
그런데 이번엔 박근혜 대통령을 소재로 삼아야겠다. 칼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그래서 신물이 날 법한 소재를 택한 건, 국민의 뜻이라며 국민의 한 사람인 내 생각을 대통령 편의대로 재단(裁斷)하고 있어서다.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고 나와 이들을 포함한 국민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말이다. 경제부장으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국민으로서 칼럼을 빌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라고 항변이라도 해봐야겠다는 얘기다.
최근 도마 위에 오른 건 10일 국무회의 발언이었다. “진실한 사람들만이 선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발언은 진짜 친박들만 추려내겠다는 해석으로 이어지며 여당 내에서 누가 진짜 친박이고 가짜 친박인지, 이른바 ‘친박-가박‘ 논쟁에 불을 지폈다. 야당에서는 선거법 위반 논란을 불렀다.
정치권의 공방은 그들의 몫이니 나까지 끼어들 생각은 없다. 나를 자극시킨 건 박 대통령의 국민 운운하는 발언이었다. 그날의 발언을 보자. 박 대통령은 “국회가 이것(민생ㆍ경제법안)을 방치해 (19대 국회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된다면 국민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이 나와 주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와 보기라도 한 것일까. 어떻게 국민의 뜻을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법안 처리가 정쟁으로 뒤로 밀려선 안 된다는 데 이의를 달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이 법안들을 처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국회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생각 또한 없다. 법안 하나하나 뜯어보면 의료 민영화 등 이런저런 논란의 소지들이 있는 것들이 적지 않고, 이런 식으로 문제법안까지 슬쩍 끼워 넣어 한 묶음으로 정당화하려는 것을 그 동안 숱하게 봐왔고, 무엇보다 박 대통령의 그 발언에는 국민과 민생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방패막이로 내세워 꽉 막힌 정국을 타개해보려는 계산이 깔려 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서도 국회가 진정 민생을 위하고 국민과 직결된 문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소신 있게 일할 수 있도록 나서주시길 부탁 드린다”고도 했다. 말이 부탁이지, 뜯어보면 국민의 뜻과 무관하게 국민을 앞세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난 6월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퇴 당시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들께서 심판해주셔야 한다”는 이른바 ‘국민심판론’의 연장선상이다.
국민의 생각을 마음대로 재단하고 곡해하는 건 국정교과서 문제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다시 10일 발언으로 되돌아가보자.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참으로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다.” 얘기인 즉, 좌편향 일색의 검인정 국사 교과서로 배운 국민들은 혼이 없거나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것이다. 정말 무서운 얘기다. 진보는 물론이고 상당수 보수 성향의 국민들까지도 “국정화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음에도, 그래서 거리에까지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진정한 뜻은 그게 아니라는 게 박 대통령이다. 그러니 박 대통령의 심복이라는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에 반대하는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며, 국정화에 반대하는 나를 무국적으로 몰아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듯하다는 유체이탈화법이나, 두 편을 나눠서 한 편을 매도하는 편가르기화법, 남들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남탓화법 등 다양한 박근혜식 화법에 또 한두 개를 추가해야 할 듯싶다. 국민의 뜻을 마음대로 재단해서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국민방패화법, 혹은 반대 의견의 국민들을 마구 깎아 내리는 국민무시화법. 이게 단지 화법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이영태 경제부장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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