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유일의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를 표방하는 ‘타이포잔치 2015’가 서울 봉래동 문화역서울284를 중심으로 열리고 있다. 타이포그래피란 문자를 활용한 그래픽 디자인을 의미하며, 포스터 간판 현수막 인터넷이미지 등이 모두 해당된다. 이번 전시는 타이포그래피를 통해 보는 ‘도시’를 주제로 삼았다. 도시는 현대인의 삶의 터전이기에, 넓게 보면 인간 생활 속의 문자문화가 주제인 셈이다. 세계 22개국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와 연구자, 미술작가 91팀이 작업을 선사했다.
올해 타이포잔치는 “포스터 나열에 급급했다”는 비판을 받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전시 ‘교, 향’과 크게 대조됐다. 전시장을 걷다 보면 타이포그래피로 재구성해낸 상상 속 도시를 경험하는 기분이다. 스튜디오 제로랩의 공간 연출은 결국 작품이 놓인 환경이 그래픽 디자인을 완성시킨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런던,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도쿄, 멕시코시티 6개 도시를 타이포그래피로 표현한 에이드리언 쇼네시 영국왕립예술대 교수의 ‘여섯 이미지, 여섯 텍스트, 그리고 리믹스’는 타이포그래피의 신전과도 같다. 전시장 양쪽으로 세 개씩 현수막이 도열해 있고, 그 가운데에는 이들을 뒤섞은 영상이 등장한다. 서울역사 뒤쪽 복도에 설치된 ‘종로 ( )가’는 가상의 종로거리를 설치해 놓고 현수막, 간판, 길거리 호객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전시했다.
전시에서 짚고 있는 트렌드는 오프라인 문자 경험의 변화다. 책을 녹여 벽돌로 만드는, 최문경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PaTi) 교수의 ‘책 벽돌’프로젝트는 파주출판도시에서 버려지는 무수한 책의 현실을 드러낸다. 그 맞은편 전시실에서 이기섭 땡스북스 대표가 기획한 ‘서울의 동네 서점’전은 오프라인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책의 분투를 보여준다. 현재 운영 중인 서울의 독립 서점들이 북콘서트, 교육 프로그램, 인터넷과의 연결 등을 통해 책의 의미를 매력적으로 재구성하는 양상을 정리했다.
박경식 디자이너가 기획한 ‘도시 언어 유희’는 인터넷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렵다. ‘도시 언어 유희’에 참가한 디자인스튜디오 김가든이 생활 소품 상점 스탠다드서플라이와 협업한 ‘해시태그’는 인스타그램에 난무하는 해시태그를 상품과 옷 위에 잔뜩 나열해 놓음으로써 ‘자랑질’의 세계가 돼버린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패러디했다. 또 다른 참가자인 박영하 디자이너의 ‘야민정음’(야구 갤러리에서 쓰이는 한글을 의미)은 포탈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 갤러리’의 문자유희를 한층 업그레이드시켰다.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하는 문자유희는 ‘대한민국’을 비슷한 글자인 ‘머한민국’으로 바꿔 쓰는 식인데, 박영하는 ‘슈퍼마켓’을 ‘分퍼마켓’으로, ‘폭풍흡입’을 ‘폭풍音입’으로 바꿔 넣었다.
하지만 온라인 흐름을 좇는 작품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정진열 디자이너는 ‘갈등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비속어의 뜻을 정리한 사전을 만들었는데, ‘나무위키’등 온라인 사이트의 내용을 베끼는 데 급급해 더러 부정확한 내용이 포함되는 바람에 트위터에서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다. 정진열은 “잘못된 정보를 수정 보완해 전시하겠다”고 밝혔다. 일차적으로 작가의 무성의함에 책임이 있지만, 한국 도시인의 삶이 크게 의존하고 있는 인터넷 언어를 반성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타이포잔치는 2001년 예술의 전당에서 처음 열렸으나 비엔날레 형태로 정례화된 것은 2011년부터로, 올해가 4회째다. 매주 토요일 문화역서울284 옆 소극장 알티오(RTO)에서 전시기획자 토크가 열린다. 12월 27일까지. (02)398-7956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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