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시민전쟁에서 승리한 미 연방정부와 북부 주, 의회는(일부는 전쟁 전부터) 아프리카계 미국인 고등교육기관을 전략적으로 설립한다. 그렇게 세워진 107개의 학교를 HBCU(Historically Black Colleges and Universities)라고 부른다. 대개 연방과 주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지역 상공인과 교회가 돈을 모아 설립ㆍ운영한 사립학교였다. 명칭서부터 드러나는 흑백분리(곧 차별)를 점차 인식하게 되면서 인종 구분 없이 학생을 모집하게 된 곳도 있고, 아예 설립 초기부터 ‘nonsectarian(무파벌)’을 표방한 곳도 있다.
하워드 대학은 1867년 3월 워싱턴D.C에 설립된 HBCU다. 발기인 중 한 명인 시민전쟁 영웅 올리버 오티스 하워드 장군의 이름을 딴 이 대학은 흑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대학으로 구상됐지만 2년 뒤 인문대학과 약학대학이 추가됐고, 지금은 의대 병원까지 갖춘 종합대학이 됐다. 첫 해 입학생은 모두 4명. 다 흑인이었다. 총장과 교수진, 이사회 멤버 대부분은 물론 백인이었다. 모데카이 와이어트 존슨 목사가 첫 흑인 총장으로 취임한 것은 반 세기도 더 지난 1926년이었다.
19세기 의회 정치인들의 전략과 무관하게, HBCU는 학문뿐 아니라 미국 인권운동의 지역 거점이자 활동가 풀로 미국 역사에 기여했다. 특히 하워드대는 연방 수도 한 복판에 설립된 상징적인 학교였다. 흑인 최초의 로즈 장학생으로 할렘 르네상스의 정신적 거름이 된 ‘The New Negro’의 저자 알레인 로크(Alain Locke)와 42년 흑인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랄프 분체(Ralph Bunche) 등은 각각 철학부와 정치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43년 1월, 하워드대 학생들은 흑인들에게 물건과 음식을 팔지 않는 워싱턴D.C 담배 가게와 카페테리아 앞에 등받이 없는 의자를 놓고 앉아 피켓을 들고 조직적인 시위를 벌였고, 그 에너지와 운동 방식은 60년대 인권운동을 떠받친 중요한 승리의 기억이 됐다. ‘블랙 파워’란 말을 만들어 미국 사회를 휩쓸게 한 것은 64년 졸업생인 흑인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였다. 퓰리처상ㆍ노벨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도 하워드 출신이다.
하워드대 학생들이 1911년 11월 17일 ‘오메가 사이 파이(omega psi phi)’라는 최초의 국제 흑인 남학생 사교클럽(Fraternity)을 창설했다. 유럽서 시작된 백인 엘리트 남자 대학생들의 비밀 사교모임들을 본뜬 것이지만, 알려진 바 부정적인 면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이 대학의 주체로서 당당히 뿌리를 내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농구 제왕 마이클 조던(노스캐롤라이나대 졸업), 상습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방송 스타 빌 코스비(필라델피아 템플대 졸업)도 오메가 사이 파이 회원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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