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외국영화가 있다. 제목도 잊어버린 이 영화를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번역 때문이다. 배경은 거센 풍랑이 휘몰아치고 있는 바다 가운데 배 한 척. 파도가 조타실 안까지 솟구쳐 올라와 창문이 깨지고 선원들은 뒤로 나자빠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침몰하게 될 절체절명의 순간. 선장이 항해사에게 외쳤다.
“port. port.”
곧바로 한글 자막에는 이렇게 나왔다.
“항구로!”
좀 이상하지 않는가. 풍랑에 휘말린 위급한 상황에서 선장의 지시라는 게 ‘항구로 가라’는 것이니 말이다. 나도 배를 탔다가 비슷한 상황에 빠진 적이 있는데 그때의 바다는 죽음의 공포가 휘몰아치는 아수라장이었다. 가까스로 도착한 항구가 얼마나 고맙고 평온한 곳인지 모른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항구로 가고 싶지 않은 배가 어디 있겠는가. 이 선장의 지시가 옳다면 프로야구 시합에서 이런 경우도 가능하다. 감독이 말한다.
“오늘의 작전은 칠 대 일로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루타를 쳐라, 삼구삼진을 잡으라, 고 타자나 투수에게 사인을 보낸다고 쳐보자. 역시 이상하다. 그렇다면 선장의 지시는 어떻게 된 것일까. 번역가가 선박해양 용어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포트(port)는 아시다시피 항구이다. 그런데 그 뜻만 있는 게 아니다.
포트는 선박에서 좌현을 뜻한다. 그러니까 선장은 배를 왼쪽으로 돌리라고 항해사에게 지시 내렸던 것이다. 그것을 모르니 ‘항구로!’ 라고 떠억 하니 붙여 놓았던 것. 번역하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으면 배를 좀 아는 사람에게 물어만 봤어도, 아니 사전만 찾아봤어도 이런 실수를 안 했을 것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해양강국, 이라는 정부의 홍보 문구가 무색해지고 지난 천 년 동안 대륙만 바라보고 살았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난 듯도 해서 씁쓸했다.
조금 더 말해보자면 우현은 스타보드(starboard) 라고 한다. 오래 전, 영국 어느 항구는 구조상 배를 좌현으로만 접안할 수 있었다. 그 시절 배에서는 화재가 빈번했다. 밤에 화재가 발생하면 자다 깬 선원들이 좌우 구분을 못해 허둥대다 죽곤 했다. 한 선장이 이렇게 말했단다. 밤에 항구가 보이면 네가 있는 곳이 좌현, 그저 별이 빛나는 밤하늘만 보이면 우현이니 그렇게 판단하라. 선원 교육 받을 때 강사가 설명해준, 그 단어의 어원이다.
아무튼 단어 하나 잘못 번역해서 절박한 상황이 우스꽝스럽게 변해버린 해프닝이었다. 반대로 번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적절한 예이기도 하다. 번역의 중요성은 외국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느낀다.
먼저 기억나는 게 학생 시절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이었다. 번역된 일본 서적을 또다시 재번역한 게 대부분이었는데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모른다. 오탈자는 말할 것도 없고 문맥도 서로 맞지 않아 이해를 포기하고 넘어간 경우가 여러 번이었다. 나는 수준이 낮은 사람이구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첨예한 시국상황의 80년 대였으니 급히 책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그러기도 했지만 번역자의 오류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다.
불문학자인 황현산 선생께 듣기로 랭보의 시가 일본으로 갔다가 재번역 되어 한국으로 오다 보니 원작과는 아주 동떨어진 작품이 되었는데 그게 그대로 한국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단다. 그걸 ‘랭보의 또 다른 승리’라고 한단다.
최근에 한국문학번역원과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내 책을 영어로 번역한 분이 궁금한 것을 물어왔는데 이를테면 내 소설에 나오는 ‘한 행비 하다’의 뜻 같은 거였다.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번역아카데미 노어권 정규과정 중에 내 단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분들도 만났는데 질문들을 받고 보니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그 고충을 절감하게 되었다. 외국에서는 번역가의 위상이 유명작가와 똑같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지 못한 우리의 현실도 함께.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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