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소년 하나가 대공황기에 아버지를 따라 미국 남부지역 감옥과 공장을 돌아다니며 음악을 채집했다. 이 젊은 청년은 아버지와 함께 130㎏이 넘는 녹음 장비를 끌고 수천 마일, 수백 날을 이름 모를 거리를 헤매며 숨겨진 노래와 사람들을 발굴했다. 의회도서관에서 발주한 민요 수집 작업이었다.
1948년 아버지가 죽자 앨런 로맥스(Alan Lomaxㆍ1915~2002)는 아버지를 이어 남부 지역과 전세계 민속음악을 녹음하고 필름으로 찍고 연구했다. 그는 녹음 작업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었고, 사라져가는 노래를 다시 살려냈다.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책만 보고 연구하는 학자와 달리 지배문화가 내버려둔 흑인 문화를 찾아냈고, 침묵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채집하여 그것을 소통의 장으로 이끌어냈다.
그는 ‘굿나잇 아이린’, 노동가요 ‘존 헨리’, CCR의 리바이벌을 통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드나잇 스페셜’과 같은 숨겨진 노래를 녹음했으며, 감옥 안의 죄수 리드벨리, 목화밭의 노동자 머디 워터스, 포크송의 전설 우디 거스리 같은 노래꾼을 찾아냈다. 그는 뛰어난 감식안으로 목소리 없던 노래를 끈질기게 찾아냈다. 로맥스는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을 사랑했고 자신의 업적을 겸허하게 사회의 공유물로 내놓았다.
흑인들의 삶 속에서 블루스를 채집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는 미시시피 델타 지역의 블루스를 듣고 그것을 채집하고 그것을 부르던 사람들과 노래를 통해 교감하며 만났다. 흑인 블루스를 가까이 하지 못했던 상아탑의 지식인들의 접근과는 사뭇 다른 작업이었다. 그는 흑인들의 삶의 현장에 함께 온 몸으로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술적으로도 당대의 선진 미디어를 잘 활용했다. 알루미늄과 아크릴 원반에 직접 녹음하던 야전 녹음기로 사라져버릴 노래들을 채집하였고 사진기와 방대한 노트로 자신의 작업 자체를 아카이빙했다.
감옥에서 남부의 농장, 산촌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이 안 닿는 곳이 없었다. 자신에게 부여한 민요 수집의 임무는 그에게 어떤 정치적 태도를 갖게 하였다. 그가 감옥에서 듣던 흑인 죄수들의 노래에는 삶의 애환과 고통, 그리고 위트와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런 노래를 듣는 순간 상류층이 즐기는 모든 음악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로맥스는 흑인 블루스에서 인간성의 빛을 보았다. 구전 민요에 대한 그의 애착은 인간 창의성의 원천인 말과 이야기를 새롭게 부활시켰다. 로맥스는 남부 흑인들이 겪는 비참한 삶과 그들의 노래에 공감하였고 그런 노래를 수집하면서 정치적 지향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피트 시거와 함께 노동조합합창단을 만들어 ‘민중의 노래(People’s Songs) ‘프로젝트를 전개하였다. 그는 민요채집가이자 음악학자였고 인류학자였으며 민요 아카이비스트였고 포크음악의 부흥을 가져온 전도사였으며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몸소 실천한 사회운동가였다.
그러한 행동으로 로맥스는 1942년부터 미 연방수사국(FBI)의 요주의 감시 대상이 된다. “근접 관찰 결과 그는 오직 민속음악에만 관심이 있는 매우 별난 사람이었다. 그는 돈에 대한 센스가 없었다. 자기 돈이나 정부 재산이나 가리지 않고 무관심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자기 일을 게을리 하다가도 마감 전에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었다.” FBI 파일에 들어 있는 앨런 로맥스에 관한 보고이다.
“모든 문화는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
앨런 로맥스는 1915년 텍사스 오스틴에서 태어났다. 로맥스는 민요를 포함한 작고 힘없는 사람들의 문화가 제국주의와 상업주의의 힘세고 큰 문화와 동등하게 대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화적 형평성이란 차원이 인간 자유, 표현과 종교의 자유, 사회 정의에 새롭게 추가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2001년 11월 2일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세계선언에서 문화 형평성이 인권으로 선포되었다.
“현대에는 문화산업이 너무 강력하여 인기 가수 한 명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 다른 수많은 가수들은 그처럼 되지 못해 열등감을 느낀다. 이런 추세 속에서 그는 돈과 권력을 휘둘러 다른 많은 사람들의 가능성을 빼앗는다. 내 삶은 이런 경향을 반대하는 데 바쳐졌다.” 그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채집하였고 그 모든 것을 평등한 문화적 유산으로 대하였다. 로맥스는 포크송뿐만 아니라 세계음악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화적 다양성은 인류 생존에 불가피한 요소이다. 매스컴과 중앙화된 교육체제가 지방언어와 표현 전통을 말소한다. 사투리는 갈수록 없어지고 획일화된 유행만 범람한다. 인구의 반 이상이 보는 영화가 유행하고, 하나의 믿음만을 주장하는 광신도들이 길거리로 나서고, 오른쪽으로만 가는 외발 자전거가 판을 친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창의성도 혁신도 나올 수 없다. 획일적인 체제로 회귀하는 유사 파시즘의 나라에서는 노래도 해석도 교과서도 모두 하나로 통일된다.
디지털 시대에 빼앗긴 말과 이야기
로맥스는 노래와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거쳐온 삶의 이야기를 함께 녹음했다. 그는 노래 뒤에 숨은 공동체 문화와 사회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작업을 토대로 그는 후에 ‘칸토메트릭스(cantometrics)’라는 노래 측정 방식을 만들어 노래와 사회의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었다.
로맥스는 1980년대에 수천 개의 노래가 서로 미치는 영향에 관한 인류학적 자료를 토대로 한 ‘쥬크박스’ 프로젝트를 통해 노래의 문화적 상호 연결성과 역사적 뿌리를 밝히는 인류학적 작업을 전개하였다. 1989년에는 헌터대학에 ‘문화형평협회’를 만들어 의회도서관과 함께 그가 수집한 모든 자료들의 아카이브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 의회도서관은 앨런 로맥스와 인연이 깊다. 그가 1930년대에 만든 수천 개의 노래 녹음은 의회도서관 민요 아카이브의 기반이 되었다. 그의 소장품과 아카이브 자료, 5,000시간 분의 녹음 자료 등은 2004년에 의회도서관에 기증되었다.
그는 항상 필드에 있었다. 로맥스의 음악인류학은 주류 사회가 방기한 분야의 노래를 찾아내어 그것을 알리고 보존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연구, 아카이빙, 전파의 피드백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노래와 음악, 춤, 구전 이야기를 현장에서 채집하고 그것을 아카이빙하고, 그 다음에 수집된 노래들을 대중에게 전파했다.
로맥스는 포크와 블루스 음악의 수원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물길을 대어 1960년대 포크와 블루스의 시대를 열어나갔다. 그는 민요라는 해묵은 세계를 새롭게 되살렸다. 그리고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채집한 민요를 본국의 기관들에게 환송하는 일을 전개했다. 문화제국주의자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내가 채집하고 모은 것을 사람들에게 되돌려줄 때 그것은 그들의 모든 것을 바꾼다”는 믿음을 실천한 것이다.
로맥스는 “민속학자의 임무는 민중을 변호”하는 데 있다고 믿었다. 민속학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도록 문화적 실천을 도와줘야 하며 교육자들은 가족과 지역의 구어 전통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 시대의 학자와 교육자는 과연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전통 구술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거나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다. 자기 말을 잊어버린 사람들, 말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들, 육체를 지니지 못한 디지털 사이보그는 어떻게 말과 이야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말로 다시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카톡’과 ‘인스타그램’으로 말하고 보여주는 현대의 디지털 세대에게 우리는 빼앗긴 말과 이야기를 돌려줄 방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백욱인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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