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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

입력
2015.11.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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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에 가을도 쓸려 내려가는 듯 하다. 방심하던 사이 감기에 걸렸다.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비 온 뒤 눅눅해진 집안 공기도 데울 겸 보일러를 틀었다가, 순간 가스비가 걱정되어 후다닥 전원을 내려버렸다. 작년 겨울 주야장천으로 보일러를 가동했다가 한 달 뒤 읽기 버거울 만큼 긴 요금의 가스비 고지서를 받은 기억이 있다. 순간 어찌나 열이 받던지 아. 210만 년 전에 폭발했다는 옐로스톤 화산도 ‘난방비 청구서’를 받고 열 받아 터졌겠구나 싶었다. 나가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버는 돈은 턱도 없다. 월급은 내 통장에 그저 출석체크만 하고 바로 조퇴한다.

날씨가 추워지면 돈 나갈 곳이 많아진다. 내복도 사야지, 자동차 월동준비도 해야지, 오늘처럼 이렇게 감기라도 걸리면 “따뜻한 물 많이 드시고, 식사 거르지 마시고, 약 챙겨 드시고, 푹 쉬시고.” 이 몇 마디를 듣기 위해 병원비도 내야 한다. 그나마 메디컬 나들이를 위해 들어놓은 의료실비보험은 서류 준비가 귀찮아 정작 제대로 받아먹은 적이 없다.

로런스 스턴이 쓴 ‘트리스트럼 샌디’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왜. 왜 우리가 파멸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부패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우리의 빈곤함과 우리의 가난 때문이지 의지 때문이 아닙니다. 동의하시겠지요. 그럼 무슨 까닭으로 우리가 가난해졌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펜스와 반 펜스짜리 잔돈을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은행권이나 금화가 아니라. 동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아!! 그래서 내가 부자가 못 되었구나. 동전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꼭 진료 영수증, 약제비 영수증, 처방전 꼭 챙겨야지. 그래야 나도 살고, 궁극적으로는 나라가 파멸하도록 둘 순 없잖은가. 이 나라에 부패할 데가 어디 더 있다고. 의사선생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선다.

몇 발짝이나 갔을까. 어두운 하늘은 위험한 상대를 만난 고양이처럼 크르릉 소리를 내더니 이내 굵은 빗방울을 토해낸다. 아. 갑자기 웬 비. 어쩌지. 편의점 가서 비닐우산이라도 하나 살까? 아, 집에 우산 많은데. 난 비닐우산 사는 게 제일 돈 아깝더라. 금세 그칠 것 같지도 않고. 아, 삼천 원. 아까워.

그러다 순간 억울해진다. 왜 나는 비닐우산 하나를 사는데도 이토록 벌벌 떨어야 하는가, 왜 내 지갑은 삼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야 할 때 입을 꾹 다물고 있는가. 친구들이 기억도 못 할 술 값 4만 2,000원은 잘도 내면서 왜 날 보호해 줄 삼천 원짜리 우산을 사는 데는 이렇게 인색한가. 길 건너 편의점으로 뛰는 2, 3분 사이 빗방울이 ‘청승 좀 그만 떨어’ 라며 온 힘을 다해 내 어깨에, 머리에 내리 꽂힌다.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 ‘투명’이라는 고급단어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냥 너는 생긴 대로 ‘비닐’우산. 나는 슬림한 정장에 부토니에, 행커치프와 구두까지 말끔하게 차려 입은 신사가 너를 쓰고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뾰족구두에 명품가방을 든 숙녀가 너를 손목에 걸고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지금 나는 발목까지 돌돌 말아 올린 젖은 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처량한 모습으로 너를 쓰고 있다. 너는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가려주지 않는 비닐우산. 들고 있는 사람의 주머니 사정까지도 투영시켜 보여주는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 급한 일이 끝나면 아무데나 세워 놓고 가도 되는 비닐우산. 거추장스러워지면 제일 먼저 버릴까 생각하게 되는 비닐우산. 너는 잃어버렸다고 해도 찾으러 가지 않을 비닐우산. 잃은 것에 대해 크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비닐우산.

순간. 나 또한 너와 같은 인생이진 않을까 슬퍼졌다. 나 또한 버려져도, 다시 찾지 않아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진 않을까. 그러면서 왜 나는 너를 하등시 여긴 것인가. 너를 너무나 필요로 했던 나에게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준 너를 왜 나는 비하하는가. 잠시 보듬어주다 버려져도 아무 불평 않는 너를, 삼천 원이라는 가격의 대인배인 너를 왜 나는 알아보지 못 하는가. 정현종의 시가 생각난다 “어디 우산 놓고 오듯/ 어디 나를 놓고 오지 못하고/ 이 고생이구나.”

몇 년 뒤에도 내가 참을 수 없는 돈이란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면 그때도 동전과 삼천 원짜리 비닐우산의 가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리라. 여전히 등신같이.

남정미 웃기는 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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