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국 문학계 최대의 사건은 단연 ‘신경숙 사태’일 것이다. 6월 말에 터진 이 사태 탓에 8월 초에 몇몇 언론이 제기했던 ‘지하철 시(詩)’ 논쟁은 잠시 화제가 되다가 사라졌다. 지하철 시란 서울시내 299개 지하철 역의 4,841개 스크린도어에 게시된 시를 말한다. 이 문제를 처음 공론화한 한국일보 황수현 기자의 기사(▶지하철역 수놓은 함량 미달 詩)에 따르면 서울시는 2008년부터 “바쁜 일상에 쫓기는 시민들에게 문학을 통해 잠시나마 정서적 여유를 제공한다”는 취지로 이 일을 시작했다.
명망 있는 문학 평론가와 시인들은 지하철 시가 수준 미달이라면서, ‘좋은 시’를 선정할 수 있는 제도와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지하철 시를 고르는 제1의 관건은 좋은 시가 아니라, ‘짧은 시’다. 지하철 시는 긴 시를 게재하기 어려운 스크린도어의 제약과 함께,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사이에 온전히 읽을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다. 지하철 역에 게시 가능한 좋은 시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처럼 짧고 우화적인 시를 가리킨다.
나는 방금 인용된 저런 시를 보고 코웃음 친다. 좋은 시는 잠언을 가지고 있지만, 잠언이 곧 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시가 중대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저 시가 한 시인의 시 세계 전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다. 스크린도어에 게시된 시들은 그 시가 실려 있던 시집이나 한 시인이 필생 동안 가꾸어온 시작의 맥락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이처럼 자신의 맥락으로부터 소외된 지하철 시는 낙서나 다를 게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지하철의 낙서를 더 나은 낙서로 바꿀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만 나서시라!’고 권하고 싶다.
먼저 말할 것은, 전문가들이 보기에 낡고 진부할지 몰라도 누구는 그 시들을 보고 감동을 먹는다는 것이다. 좋은 시는 기존의 미의식에 도전하고 상식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명망가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지만, 장소특정적인 요소가 강한 지하철 시에는 다른 고려가 필요하다. 나는 “일반 시민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용기나 위로 등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은 시가 선호된다. 폭력적인 표현이나 부정적 내용이 담긴 시는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더라도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서울시의 선정 기준을 지지한다.
정작 지하철 시의 문제는 이 분야에도 선정권을 차지한 브로커들이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도 아니요, 거간꾼들이 뽑은 질 낮은 시로 채워져 있어서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스크린도어에 명시(名詩)가 없는 게 아니라, 거기에 시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수 년 전에,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 형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는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멈추시오’, ‘돌아가시오’ 같이 필수 불가결한 것만 있어야 한다. 내가 외국 여행을 갔을 때,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저런 알지 못할 ‘안내문’이 적혀 있다면 무척 당황할 것이다.” 서울시가 수백 만원에서 수천 만원에 이르는 스크린도어의 광고 수익을 포기하면서까지 시민의 정서를 위해 애쓰는 것은 칭찬할 일이다. 하지만 스크린도어의 시는 그 장소에 반드시 있어야 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낙서 없는 말끔한 스크린도어를 마주하고 싶은 시민도 많다.
신경숙 사태 이후 문학권력 논쟁이 분분했지만, 지금까지 논해진 것들은 아무것이나 넣으면 만두 속이 되는 것처럼 편의적이었다. 예컨대 10월 29일치 한국일보 기사(▶ 숫자로 확인된 문학권력의 실체)로도 소개된 전봉관ㆍ이원재ㆍ김병준의 정량적ㆍ통계적 연구는 문학권력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 주지 못하는 ‘통계의 마술’일 뿐이다. 거대 출판사의 상업주의 전략을 문학권력으로 적시하고 나면,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에 시를 게시하면서 그것을 당연시 하는 문사(文士)의 위세는 보이지 않게 된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새잎, 2011년)에 대해 쓰려고 했던 이번 글의 원래 요지는, 저런 ‘문학권력’이 판을 치는 곳에서 르포 작가나 논픽션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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