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기업복지의 국가다. 근로자의 급여와 부가복지(fringe benefits) 및 기타 사회적 필요 대부분을 기업이 제공한다. 따라서 기업에 머무는 것이 개인의 후생을 결정하는 관건이며, 적어도 국민연금 수급 시점까지는 직장을 유지해야 한다. 예컨대, 1964년생 근로자가 55세에 1차 노동시장에서 은퇴하는 경우 연금 수급 시점인 63세까지는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나라 중고령 근로자들의 취업률이 OECD 두 번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연금 수급 연령이 되어도 상황이 썩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연금의 소득대체율이 낮기 때문이다. 은퇴 전 소득의 몇 %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인 소득대체율은 사회보장제도의 적정성 및 수준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인데 현재 국민연금은 46.5% 수준이다. 이마저도 가입 기간이 40년을 넘어야 가능한 이야기라 재직 기간이 짧은 근로자의 소득대체율은 40%에 훨씬 못 미친다. 2028년이 되면 공식 소득대체율은 40%로 수렴되며 이 경우 실질소득대체율은 20% 수준에 불과할 것으로 추계된다.
이와 같이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 기능이 취약한 상황에서는 대안 연금이 중요한데 우리의 경우 기업연금(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이 그 역할을 담당한다. 개인연금은 저축과 같아 저소득 근로계층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보편적 노후소득 보장제도로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결국 현재 조건에서 1차 노동시장 이탈 시점부터 국민연금 수급 시점까지의 소득 공백을 보충하고, 국민연금의 낮은 소득대체율을 보완할 유일 대안은 퇴직연금뿐이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이 2005년 12월부터 시행되었으니 우리 퇴직연금도 어느새 10년의 나이를 먹은 셈이다. 우여곡절의 시간 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음에도 가입자 수는 전체 상용근로자의 51% 수준(560만 명)에 그치고 있고, 도입 사업체는 전체 사업장의 16.5% 수준인 28만8,500여개에 머물러 있다. 이상의 가입근로자와 퇴직연금 전환 사업장 규모를 연계하면 퇴직연금 도입 사업장의 대부분이 대기업임을 추론할 수 있다. 즉,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체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77.0% 수준이지만 30인 미만 중소영세사업체 도입률은 15.1%에 불과하다.
이처럼 시급한 필요와 10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퇴직연금의 전면화가 지체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퇴직급여를 설정 할 때 퇴직연금과 퇴직금 가운데 선택이 가능하도록 해 놓았다는 점이다. 퇴직금은 기금 운영ㆍ관리에서 사용자가 갖는 자율성이 크고 특히 외부적립 의무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퇴직연금에 비해 사용자들의 선호가 크다. 근로자의 입장에서도 노후재원 기능이 상대적으로 큰 연금에 비해 중간정산 등의 방법으로 긴급한 현금수요를 충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퇴직금이 더 매력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선호의 불균형을 교정하지 않으면 퇴직연금의 전면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퇴직연금과 퇴직금 간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퇴직연금 제도를 배타적 퇴직급여 제도로 의무화하는 것이다. 장기근속 유인을 위해 1년 이상 계속 근무자들만을 적용 대상으로 하고 있고, 운용의 특성 또한 은퇴 후 소득재원으로서보다는 급여보상적 성격이 강한 현행 퇴직금 제도가 급변하는 노동시장과 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근로형태의 다양화, 1년 미만 단기근속자 비율의 증가, 기간제 및 파견 등 비정규직 근로 유형의 증가 등을 고려하면 현행 퇴직금 제도는 근로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하며 따라서 퇴직연금으로 대체 조정이 불가피하다.
제도적 강제와는 별도로 퇴직연금제도와 운용체계를 다양화 해 제도 활성화를 모색하는 것도 필요하다. 현행 퇴직연금 제도는 계약형만 배타적으로 허용해 연기금 설계ㆍ운용에 연금사업자들의 역할이 지배적이다. 대부분의 선진국에는 계약형과 기금형이 병존하며 특히 미국, 유럽의 경우 노사 합의로 별도의 연기금 기구를 설립하고 이를 통해 퇴직연금 기금을 관리ㆍ운용하는 기금형이 주류라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또한 제도의 폭을 확대할 필요가 절실하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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