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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에선 바다보다 진한 그날의 恨이…제주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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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에선 바다보다 진한 그날의 恨이…제주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입력
2015.11.1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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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저 섬에서 한 달만 뜬 눈으로 살자/저 섬에서 한 달만/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이생진, ‘그리운 바다 성산포’ 중에서)

오조마을 방파제에 핀 해국 뒤로 성산일출봉이 아련하게 보인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오조마을 방파제에 핀 해국 뒤로 성산일출봉이 아련하게 보인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성산·오조 지질 트레일은 섬이 된 바다(내해)를 한 바퀴 돌아온다. 이생진의 시처럼 성산포는 애초에 썰물 때만 걸어서 닿을 수 있는 섬이었다. 1920년대에 제방을 쌓아 고성리와 연결되고, 20여 년 전에는 갑문(한도교)를 만들어 오조리와 이어졌다. 오조마을 깊숙이 파고든 바다는 제방과 갑문에 막혀 내해가 되었다. 섬이었던 성산포가 도리어 바다를 감싼 형국이 된 것이다.

제주의 4개 지질트레일 코스 중 유일하게 이 길은 오조리와 성산리 마을 주민들이 직접 코스를 잡았다. 출발은 성산포로 가는 갑문을 코앞에 둔 ‘오조 해녀의 집’ 부근 주차장이다. ‘지오트레일(GEO Trail)’ 붉은색 길안내 표시를 따라가면 오조리로 먼저 가고, 푸른색을 따르면 성산포로 곧장 간다.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이기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첫발을 떼기에는 먼발치서 점점 성산일출봉에 가까워지는 오조리 코스가 더욱 정감 있다.

도로에서 오조마을로 들어서는 길 왼편은 내수면, 오른편은 식산봉(食山峰)이다. 높이 40m의 조그만 오름인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산 전체를 낟가리를 쌓은 것처럼 위장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멸종위기종 2급으로 지정된 황근의 최대 자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무궁화와 비슷한 노란 꽃은 6~8월 한여름에 피기 때문에 지금은 잘 살펴야 한 두 송이 찾을 수 있다.

제주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빌레용암
제주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빌레용암
사진가 강정효씨가 울담 밭담 산담 등 제주의 돌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가 강정효씨가 울담 밭담 산담 등 제주의 돌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조마을 울담 안에서 감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오조마을 울담 안에서 감귤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내해를 관통하는 나무다리를 통과해 오조마을 어귀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용천수 ‘족지물’이다. 주민들이 샘이자 목욕탕으로 이용하는 용천수는 이 마을에만 12개나 있었지만 지금은 유일하게 족지물만 남았다.

제주의 마을 풍경이 소박하고도 아름다운 건 돌담이 풍기는 아늑함과 관계가 깊다. 집집마다 둘러쳐진 낮은 울담, 한겨울 찬바람을 막아주고 자연스럽게 경계가 되는 밭담, 묘지의 봉분을 중심으로 네모지게 쌓아 올린 산담 등 돌담을 부르는 이름마저 정겹다. 제주의 돌과 바위를 주제로 꾸준히 사진작업을 해온 사진가 강정효씨는 “나무가 스러질 정도의 태풍에도 돌담은 잘 넘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엉성해 보여도 자연스럽게 바람이 통하고, 한쪽을 흔들면 반대편 끝부분이 움직일 정도로 유기적으로 잘 연결돼 있기 때문이란다.

울담과 밭담에 산담까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오조마을을 지나면 길은 고성리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선 제주 용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투물러스 지형도 자세히 볼 수 있다. 공기에 노출된 표면은 응고되고 내부 용암은 계속 흘러 만들어진, 곰보빵처럼 부풀어오른 용암덩어리를 뜻하는 투물러스를 제주에서는 ‘빌레’라고 부른다. 강 작가는 “화산지질 연구자들이 제주를 먼저 둘러봤다면 분명 ‘빌레’가 공식 용어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180만년 전부터 1000년 전까지, 지구시간으로 보면 아주 최근까지 제주는 화산활동이 활발한 곳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산일출봉 왼편 우묵개동산에 보랏빛 개쑥부쟁이가 활짝 펴 있다.
성산일출봉 왼편 우묵개동산에 보랏빛 개쑥부쟁이가 활짝 펴 있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수마포구에서 터진목으로 이동하고 있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수마포구에서 터진목으로 이동하고 있다.
고성리 말 타기 체험장 부근의 유채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고성리 말 타기 체험장 부근의 유채가 노랗게 꽃을 피웠다.

고성리 제방 머리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만 유채 밭이 노란 물결이다. 말 타기 체험을 함께하는 관광용이다. 지금은 콩 수확이 끝나고 내년 봄에 꽃을 피울 유채와 보리 씨앗을 파종할 시기여서 활짝 핀 유채 꽃 뒤로 펼쳐지는 성산일출봉의 모습이 더욱 색다르다.

관광농원에서 길을 건너면 그제야 성산일출봉과 연결된 바깥바다다. 제방으로 물길이 막히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넘나들던 길목인 ‘터진목’이다. 색깔 고운 바다와 우뚝 솟은 절벽이 더 없이 평화로운 해변이지만, 안내문에 쓰인 것처럼 주민들에겐 ‘한과 눈물의 땅’이기도 하다. 제주 4.3사건 때 성산면 주민들이 서북청년단에 집단으로 학살당한 곳이다. 어쩌면 바닷물보다 더 짙고 깊이 숨겨온 눈물과 울음이 ‘터진 목’일 수도 있겠다.

비극의 흔적은 해변을 따라 더 이어진다. 터진목에서 수마포(조선시대 말 목장이었던 성산일출봉 분화구에서 기른 말을 실어 나르던 포구)을 지나 성산일출봉 아래 해변으로 내려가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커다란 구멍이 듬성듬성 뚫려 있다. 단단한 퇴적층을 뚫은 동굴은 1945년 항복을 코앞에 둔 일제가 이곳을 최후 격전지로 정하고 진지를 구축한 흔적이다. 18개나 되는 동굴 입구는 분리된 것 같지만 일부는 내부에서 왕(王)자 형태로 연결돼 있다. 전남의 광산 노동자들을 동원해 만든 동굴진지는 다행히 제대로 사용해 볼 틈도 없이 일제의 패망으로 흔적만 남았다.

수마포구부터는 본격적으로 성산일출봉 관광지구다. 그 사이 큰 왕관처럼 윤곽만 보이던 성산일출봉의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관광객이 줄지어 오르는 곳곳이 푸른빛이고 기암절벽이다. 분화구 직경 600m에 높이 180m의 봉우리는 멀리서 본 것보다 웅장하고 우람하다. 지질트레일은 봉우리를 오르지 않고 주차장에서 왼편으로 빠진다. 개쑥부쟁이 꽃 무리가 분홍빛으로 장식된 우묵개동산(우뭇가사리의 제주방언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뒤편으로 펼쳐지는 성산일출봉이 눈앞에서도 신비하고 아련하다.

요즘 제주에선 카페, 중국인, 작가(육지에서 온 사람들 열에 예닐곱은 자칭 작가란다)를 신삼다(新三多)로 꼽는다는데, 이곳에도 카페와 식당이 즐비하다. 여기까지 걸으면 조금씩 허기가 오를 시간이라 지질트레일 여행자에게도 적당한 지점이다. 성산포 마을을 통과해 갑문을 건너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성산·오조 지질트레일은 마무리된다. 약 6km, 그리운 섬 성산포와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며 쉬엄쉬엄 3시간 정도 걸었다. 제주=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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