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노사정위원회 공익전문가들이 노사정 대타협의 추가 논의과제 중 하나인 파견 업무 확대를 두고 "제도적 보호 장치가 마련되면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면서 논란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16일에는 비정규직 계약기간 연장(35세 이상 노동자에 대해 4년으로)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해 노사정이 다시 한 번 격론을 벌일 예정입니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고령자(55세 이상)와 고소득 전문직(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종), 제조업 중 일부 업종인 뿌리산업(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에 대한 파견을 허용하고, 35세 이상 노동자가 원한다면 비정규직 계약 기간을 현행 최대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도록 관련 법을 개정하겠다는 입장입니다. 노동계는 불안정 고용을 확산시킨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지만 정부는 “현장 비정규직들이 원한다”며 파견확대와 비정규직 계약기간 연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파견업종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노사정 공익전문가 안이 발표된 다음날인 10일에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예고에도 없었던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수도권 5개 지역 지방노동청의 사업주 302명과 기간제 근로자 및 구직자 274명을 대상으로 한 ‘비정규직법 개정 관련 설문 조사’ 결과 자료였습니다. 보도자료는“35~54세 비정규직 노동자 대다수가 현행 계약기간 2년이 짧다고 생각하고, 정규직 취업이 어렵기 때문에 고령, 전문직 파견 확대에 동의한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사실 정부는 9월부터 4차례에 걸쳐 현장 비정규직들과 간담회를 갖고 의견 수렴을 해왔습니다. 그때마다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동소이한 반응을 보여 왔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사정 대타협(9월 13일)을 앞두고 노사가 줄다리기를 하고 있던 9월 3일 이기권 고용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의 한진중공업 본사를 찾아가 기간제, 파견직 등 비정규직 근로자 9명과 가진 간담회 자리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사무보조 업무를 한다는 한 파견직 근로자는 “파견 업무가 제한돼 있어 전공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이 더 좋은 일자리로 이직할 수 있도록 파견 허용업무가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대리급의 한 비정규직 사원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느끼지는 못한다며 채용 때부터 4년으로 계약을 하면 좋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비정규직 확대를 추진하는 정부로서는 반색할 수 밖에 없는 반응이었습니다. 이들의 발언을 하나하나 메모하던 이 장관은 기자들에게 “비정규직 문제는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근무 기간이 길어질수록 정규직 전환율이 높아지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인건비 절감 차원이 아니라면 비정규직 기간 연장과 파견 확대는 필요하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이 장관의 발언은 이후 박근혜 정부의 철학으로 소개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간담회나 조사가 6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을 얼마나 대변할지 의문입니다. 일례로 한진중공업 간담회 현장에는 계약연장이나 정규직 전환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원청회사와 파견업체 대표도 함께 있었습니다. 간담회 참석자들이 본인의 의사와 관련 없이, 정부가 제시하는 안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밖에 없는, 이른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다. 너는 대답만 하면 돼)'식 대답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간담회 이후 노동계에서는 “짜인 각본 속 간담회를 토대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규직이 될 수 없으니까 차악으로써 비정규직 연장이라도 택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속마음인데, 정부나 경영계는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견강부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고용부 내부에서도 “이기권 장관이 소신을 갖고 진정성 있게 비정규직 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인정하나, 과연 얼마나 현실과 부합할지는 미지수”라는 뒷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부가 연내 입법을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기간연장이나 파견 확대 관련 사항은 일반해고 지침 및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이슈만큼이나 노사정 간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입니다. 국회 법안 심사에 제출될 합의안에 어떤 단어나 표현이 쓰이느냐에 따라 파급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합의 자체가 쉽지 않은 과제이기도 합니다.
현재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노사정위원회의 ‘비정규직 고용 및 차별시정 제도 개선을 위한 실태조사단’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설문조사 문항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문조사의 표본 선정과 질문 내용 등을 두고서 구절 하나 하나 노사간 접점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표성을 가지려면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전화설문과 면담이 필요하고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최소 3개월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대다수 비정규직의 근로조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실태조사이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노사 어느 쪽도 쉽게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만큼, 정부가 지금 신경을 써야할 일은 견강부회식 언론홍보가 아니라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이해당사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설문조사의 객관적 방법과 절차를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아무리 노동개혁이 시급하다고 해도 지금 정부가 새겨야 할 말은‘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일 것입니다.
장재진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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