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희단거리패 정기공연 ‘사중주’
“아, 육체의 노예. 산다는 고통, 그리고 신이 아니라는 고통. 의식은 있되,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
속옷만 입은 남녀가 식탁과 바닥을 뒹굴며 완연한 문어체 대사를 지극히 연극적인 말투로 내뱉는다. 대통령과 간통한 메르테이유, 영부인과 간통하려는 발몽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 세상은 엉망이고 삶은 허무한 이 두 사람에게 사랑과 섹스는 게임이자 유희일 뿐이다.
29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사중주’는 야하면서도 지적인 장광설로 성과 권력, 역사와 개인의 문제를 들여다본다.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진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독일 극작가 하이네 뮐러(1929~1995)가 2인극으로 쓴 이 작품은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 채윤일이 연출을, 극단 간판배우 김소희, 윤정섭이 각각 메리테이유, 발몽 역을 맡았다. 7일 공연에는 종일 비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대학로 어벤져스’에 기대를 품고 온 관객 100여명이 극장을 빼곡하게 메웠다. 15세 이상 청소년관람가 연극이건만, 매표소 앞에서는 앳된 얼굴의 관객에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관전 포인트는 남녀가 여러 차례 뒤바뀌는 역할놀이다. 식탁 위 정사에서 “(대통령은) 당신이 궁금해 하는 잠자리에서도 탁월하다”며 발몽(윤정섭)의 질투심을 한껏 자극하는 메르테이유(김소희)에게, 발몽은 “정숙한 살덩어리”인 대통령 부인 투르벨을 “사냥감”으로 낙점했다고 선포한다. 김소희가 무대 위에서 신사복을 입고 발몽으로 분하는 사이, 어느 새 허연 분칠을 하고 투르벨로 분한 윤정섭이 나타나 콧소리를 한껏 넣어 이렇게 외친다. “당신이 내 젖가슴에 저항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이게 바로 그 시험이에요. 난 여자예요!”
중성적인 음성으로 메르테이유와 발몽을 연기한 김소희는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는 순간 숫처녀 볼랑주로 분해 연신 앳된 목소리의 ‘솔’음을 구사했다. “신이 어디에 있는지 제게 그토록 강렬하게 보여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에요!”젊은 육체를 영원히 붙잡아두기 위해 두 사람은 상대를 죽음까지 몰고 간다.
땀으로 흠뻑 젖은 배우들의 열연은 인상 깊지만, 문어체 말투와 과장된 몸짓으로 점철된 극단 특유의 ‘연극적인 연기’는 관객마다 호오가 갈릴 듯하다. 두세 번 의미를 곱씹게 되는 대사가 일품이다. (02)763-1268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