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은 사람으로 치면 한창 때를 지난 중년이다. 돌아보면 맨 손으로 일군 아파트들이 위용을 뽐내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골목 사이사이 수상한 단어들이 눈에 띈다. 고독사, 치솟는 대학 등록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출산율.
소설가 황석영(72)씨가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후자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신작 장편 ‘해질 무렵’(문학동네)에서 기성세대가 청산하지 못한 과거의 업보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상처로 돌아오는지를 살핀다.
“해질 무렵은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80년대 중반에 부상한 중산층의 상당수는 군사독재와 재개발 과정에서 떨어진 부정과 비리의 콩고물을 먹고 성장했죠. 오늘날 대한민국의 각박한 풍경은 윗세대의 업보입니다. 지금 청년들이 느끼는 현실은 낮에 꾸는 악몽 같을 겁니다.” 5일 일산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해질 무렵’이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회한을 그린 소설”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60대 건축가 박민우와, 대학로에서 연출과 편의점 ‘알바’를 병행하는 20대 정우희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경남 영산 출신으로 어릴 때 서울에 올라온 박의 가족은 산동네에 자리를 잡고 어묵을 팔아 생계를 잇는다. 마을의 유일한 학생이던 박은 달동네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부에 매진해 일류대에 진학하고 이후 사원 100여명을 거느린 건축회사 대표자리까지 올라간다.
우희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년이다. 좋아하는 연출 일을 계속하기 위해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편의점을 지킨다. 유통기한이 막 지난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반지하 방에서 곰팡이와 함께 사는 우희에게 유일한 친구는, 피자집 알바 시절 떼인 임금을 대신 받아준 김민우다.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을 잇는 단어는 ‘철거’다. 나이 들어 찾아간 고향이 옛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에 실망한 박에게 동료 건축가는 말한다. “우리가 다 밀어버렸잖아.” 전문대를 졸업하고 철거지역 용역 관리일을 보조하던 김민우는 울며불며 끌려 나오는 철거민들 중 지적장애아가 포크레인에 뛰어들어 절명하는 걸 보게 되고 다음 날 해고를 당한다.
작가는 전태일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전태일이 일했던 평화시장 가게의 사장을 보고 이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기자가 용케 사장을 찾아내 마이크를 들이대는데 이북 사투리를 쓰더군요. 딱 알아봤지. 전쟁 후 월남한 사람들이 농촌 근대화 사업 때 서울로 옮겨와 장사를 시작했거든요. 사장은 전태일이 그 정도까지 힘든 줄 몰랐다고 말하며 고개를 드는데 눈물이 한 방울 흐르더라고. ‘아! 저 눈물이 바로 한국 중산층의 트라우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민우는 자신의 부 안에 노동자와 철거민의 눈물이 섞였단 사실을 모른다는 점에서 사장과 비슷하다. 그러나 사장과 달리 박민우는 회한에 휩싸이지 못한다. 정신 없이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과 권력에 편승한 건 일부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적 트라우마는 구세대에겐 정신적 공허함을, 젊은 세대에겐 지옥 같은 현실을 남겼다.
“한국은 민주화 과정에서 어정쩡한 타협으로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어요. 그 타협의 산물이 현재입니다. 과거의 망령이 계속 덮쳐오는 거죠.”
작가는 3년 전 ‘여울물 소리’를 출간하며 만년 문학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해질 무렵’의 현장감과 당대성은 만년이란 말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만년 문학은 회고하고 정리하는 게 아니라 당대와 겨루는 거예요. 치매 걸린 사람처럼 소설 썼던 최초의 시기로 돌아가, 계속해서 실험하고 모험하고 시대와 갈등할 겁니다.” 그는 오랜만에 원로 작가란 부담에서 벗어나 신명 나게 썼다며 웃었다. “소설가는 사상가가 아니라 시정배(市井輩)예요. 어깨 힘 쫙 빼야지. 평생 시장 복판에서 사람들 얘기 쓸 겁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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