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출근길에 들려온, 터키 총선결과는 그야말로 깜짝 뉴스였다. 불과 5개월 전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하고 연이어 연합정부마저 구성하지 못했던 집권여당 정의개발당(AKP)이 10%에 가깝게 지지율을 끌어올리면서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총 550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이번 선거에서 과반수를 훌쩍 넘는 317석을 거머쥔 여당은 2001년부터 지켜온 정권을 앞으로 4년 계속 유지하게 된 것이다.
의원내각제인 터키는 독일처럼 실질적인 권한을 총리가 갖고 있어 지금의 여당 대표인 아흐메드 다부토울루 총리가 실권자다. 그래서 다부토울루 정부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현지 언론에서는 아예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현재의 대통령 직위는 헌법상 명예직이나,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1년부터 작년까지 13년간 총리로서 정부를 이끌었고, 작년 8월에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를 거쳐 선출직 대통령으로 뽑혔다.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제로 전환하기 위한 헌법 개정을 검토하고 있는 대통령과 의원내각제에서의 수장인 총리, 지금은 그 누구의 정부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구조다.
터키 유권자들, 민주화보다 경제성장에 한표
총선 결과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는다. 터키 총선과정을 지켜본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참관단은 이번 총선이 언론과 야당 탄압, 폭력과 공포 분위기에서 불공정하게 치러졌다고 비판했다. 특히 총선 직전 발생한 앙카라 자살폭탄 테러 사건과 이로 인한 시리아 및 IS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 등으로 사회에 전반적인 공포 분위기를 가져온 것이 결과적으로 집권 여당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터키의 유권자들이 지금의 야당을 더 이상 믿지 못하고 경제 발전에 대해 경험이 있는 현 정부를 택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금년 중 두 번에 걸친 총선의 영향으로 1년 내내 정치불안이 지속되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고 주요 국가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이 주인 없는 과도정부하에서 이뤄지고 있었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미국, 러시아, EU 등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배짱도 투르크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점에서 유권자들을 만족시켰다.
총선 결과에 대해 터키가 그 간의 정치적 불안을 해소하고 앞으로 경제발전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뉴욕타임즈나 영국 가디언은 여전히 사회적 불안요인이 남아있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정치 불안전성이 제거되면서 경제에 대해서는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은 공통적이다. 지금의 여당이 처음 정권을 잡았던 2001년의 터키의 1인당 국민소득은 3,000달러에 불과했다. 정책의 우선순위를 모두 경제발전에 맞춘 지금 정부가 불과 10년만인 2010년에 1인당 국민소득을 1만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이 기간 9.2%라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작년 터키의 경제성장률은 2.9%에 그쳐 과거에 비하면 성장속도가 둔화됐다. 그러나 유럽 주요국가들이 제로 성장, 심지어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보일 때도 비교적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향후 터키의 개혁방안은 지금껏 주요 키워드 정도만 발표된 상황이다. 세수의 투명성, 산업 경쟁력 확보, 개인 저축률 향상, 고용창출과 연금개혁이 그것인데 문제는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화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터키 정부는 조만간 고부가가치 상품 수출, 내수 소비진작 등 세부전략을 포함하는 신정부 100일 계획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과도한 복지공약, 외국기업에 부담될 수도
올 10월, 다부토울루 총리는 우리 돈으로 약 40만원 수준인 월 최저임금을 내년부터 50만원 이상으로 올리겠다고 약속했다. 터키는 최저임금의 일정부분을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매년 약 60억달러(7조원)의 재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고용주 역시 임금 이외에 근로자에게 지원해야 하는 사회보장세금까지 인상되므로 이에 따른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노동계의 목소리도 커질 전망이다. 그 동안 터키는 유럽국가들과는 달리 노동자의 권리가 고용주에 비해 약한 편이었다. 서유럽국가들이 동유럽 보다는 터키를 제조기지로 삼은 이유 중 하나가 터키 노동법이 고용주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해고가 자유롭고 인건비도 훨씬 저렴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각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결성과 가입이 많이 이뤄지고 있어 앞으로 터키에 투자하려는 기업은 보다 꼼꼼하게 살펴 보아야 한다.
도로 항만 대형공장 등 인프라 건설에 특화된 전문 건설기업들의 수는 전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많다. 터키기업들의 참여범위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중동 산유국 등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옛 영토를 능가할 만큼 넓게 진출되어 있다. 투르크 민족이라는 동질성이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나 같은 이슬람으로서의 친밀감, 과거부터 꾸준히 해온 교역 등 여러모로 갖출 것을 다 갖고 있다는 평이다. 특히 지금의 정부는 건설산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건설업은 앞으로도 정부의 지원을 아낌없이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건설업은 단기간에 고용창출과 자금동원, 경기부양 등 표면적인 경제지표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지금의 정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산업이다.
집권여당이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경제발전 전략을 불안하게 여기는 시각도 많다. 체계적인 산업발전을 통해 근본적인 발전을 이루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지표를 부각시키는데 맞춰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의 건설부양 중심의 경제 정책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외국기업에게는 많은 기회가 되고 있다.
터키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은 최근 수년 전부터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에 참여해 터키 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제3대교,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해저 터널, 투판베일리의 화력 발전소, 이즈미르 지역의 정유 정제 공장 등 프로젝트 성격도 다양하고 첨단기술과 자본이 결집된 것들이어서 터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앞으로도 현 정부가 터키 공화국 탄생 100주년을 목표로 하는 ‘비전 2023’ 달성을 위해 국가 인프라 개선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경우 우리 기업들에게도 더 많은 프로젝트 수주 기회가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터키의 남은 과제들
여당에게 과반수 의석을 내 준 야당들은 대표 사퇴론 등이 나오면서 터키 정치권은 선거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제1야당 공화인민당(CHP)은 전당대회 갈등이 표출되었고, 쿠르드족 계열 인민민주당(HDP) 대표는 사퇴압박을 거절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총선결과에 고무된 에로도안 대통령과 집권 여당은 대다수의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는 대통령제로의 전환 개헌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어 앞으로 정계는 더욱 혼란스러워 질 것이 확실하다.
이러한 정치적 악재를 이겨 내기에는 지금의 터키는 앞에 놓인 과제들이 하나같이 심각한 것들이다. 3대 신용평가기관 중 하나인 피치(Fitch)는 터키의 전반적인 경제지표들이 여전히 안정적이지 못하다고 발표했다. 당장 연초부터 정치 및 경제 불안으로 30% 이상의 급격한 약세를 보여주던 터키 리라화 가치가 총선 직후인 11월 2일에는 1달러당 2.77 리라 수준으로 안정화되는 듯 했으나 이내 11월 5일 기준 2.90 리라 수준으로 다시 약세로 돌아선 것은 터키의 불안전성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시장의 판단을 보여준다.
다만 대부분 기관들이 내년에는 환율안정 등 터키의 거시경제지표가 다소 개선될 전망으로 보고 있다. 내년부터 경기가 호전된다면 터키가 주력으로 삼고 있는 국책사업 프로젝트 조달금리의 하락이 이어져 외국인 투자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터키정부가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정책을 지원할 경우 시너지 효과로 더욱 경제가 활기를 보일 전망이다.
리라화 가치와 터키 경제가 회복될 경우, 올해 전년 대비 5% 내외의 감소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 터키 수출은 자유무역협정(FTA) 효과와 맞물리면서 자동차 및 부품, 석유화학, 섬유 등의 분야에서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편, 시리아 난민문제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터키는 유럽연합(EU)과 논의할 것이 많다. 터키가 수용하고 있는 시리아 난민은 2백만명이 넘고 있어 이미 한계치에 접어들었다. 그 간 묵묵히 아프리카에서 몰려드는 난민을 홀로 수용해오던 터키는 유명 휴양지 보드룸 해변에서 죽은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이 문제가 전세계의 관심을 끌면서 그 부담을 EU와 나눠질 수 있게 됐다.
현재 터키는 난민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길거리에 나온 시리아 난민 아이들은 구걸을 위해 차도로 뛰어드는 등 각종 사고 위험과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해결할 것들이 많지만, 난민 수용을 명분으로 EU로부터의 경제적 지원, EU 가입에 관한 논의 재개 등 그만큼 얻을 수 있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 집권당이 이슬람 원리주의 색채가 점점 짙어지면서 이로 인한 사회 갈등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연말연시에 주고받는 선물 바구니에 주류가 금지되는 등 터키를 지탱해 오던 탈 종교적 정책이 퇴색하고 있어 경제발전의 또 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KOTRA 이스탄불 무역관장 김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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