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동독 공산당 정치국 대변인 귄터 샤보브스키(Guenter Schabowski, 1929~2015)가 1989년 11월 9일 저녁 새 정부 ‘여행자유화 정책’ 발표 기자회견장에 섰다. 그의 손에는 여행 허가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내용의 회견문이 들려 있었다.
50여 일 전인 8월 19일 동독인 600여 명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을 통해 동독을 탈출, 부다페스트와 체코 프라하 서독 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신청했다. 그들의 망명 허용 여부를 두고 당사국과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은 골치를 썩이기 시작했고, 국제 사회는 평화 시위와 기도회 등을 벌이며 동독 민주화와 망명 허용을 촉구했다. 폴란드 정부는 9월 12일 체류 동독인들을 강제로 동독에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고, 체코도 얼마 뒤 망명을 허용했다.
10월 9일 7만여 명이 참여한 라이프치히 월요시위를 시작으로 동독인들의 민주 개혁 평화시위가 줄을 이었고,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 서기장이 사퇴한다. 11월 4일 동베를린 시위 참가자는 5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에곤 크렌츠 서기장의 새 정부에 대해 언론 출판 여행 자유와 민주 개혁을 촉구했다. 11월 9일의 회견은 그 끝에 나온 거였다.
정부 개혁조치의 골자는 동구 주변국 여행 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동ㆍ서독 국경을 통한 출국도 일정 요건을 갖추면 허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빈번히 속아왔던 동독 기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방 기자들, 특히 독일어에 능숙하지 않은 외신 기자들은 동서독 국경이 열린다는 사실 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언제부터 발효되나”라는 한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서류를 뒤적이던 샤보브스키가 별 생각 없이 “지금 즉시”라고 답변했고, 외신 기자들이 “베를린 장벽이 열렸다”는 소식을 급전으로 전송하기 시작했다는 게, 그날 일의 알려진 골자다. 하지만 “지금 즉시”라는 답변을 이끌어낸 질문자가 누군지, 샤보브스키가 어쩌다 실수를 한 건지는 설이 분분하다. 확실한 것은 갓 출범한 동독 정부가 그만큼 허술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방송을 들은 양독 주민들이 그 날 밤부터 장벽 검문소로 몰려 들었고, 평소라면 즉각 발포했을 동독 국경수비대 역시 방송 보도와 엄청난 인파에 여권과 여행허가서를 검사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검문소 문을 열게 된다.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무너졌다.
통일 후 샤보브스키는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자신과 전 동독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고 기민당 선거운동에도 동조, 동독 시절 동료들로부터 ‘벤더할츠(Wendehalsㆍ기회주의자ㆍ변절자)’라 불리기도 했다. 그는 동독시절 서독 탈주자 즉결처형 등 연루 혐의로 95년 기소돼 3년형을 선고 받고 99년 12월 투옥됐지만 1년 만에 특사로 석방됐다. 경색증으로 투병하던 그는 지난 11월 1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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