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경제 박종민] "3-5 패배."
차두리(35ㆍFC서울)가 자신의 축구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했다. 차두리는 지난 7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수원 삼성과 시즌 마지막 슈퍼매치 후 은퇴 기자회견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기준은 차범근(62)이었다. 그 사람을 넘고 싶었고 그 사람보다 잘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알게 됐다. 유럽을 가보니 이 사람이 정말 축구를 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범근이라는 사람의 근처에도 못 가는 선수생활을 해서 졌다는 표현을 썼다"고 밝혔다.
차두리는 축구인생을 비교할 때 아버지 차범근이 5골을 넣었다면 자신은 3골을 성공시켰다고 비유했다. 그는 "월드컵 4강과 원정 16강 진출을 일궈냈다. 대표팀 생활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의 10년이 개인적으로 축구인생에서 3골을 넣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현역시절 차두리는 화려한 조명을 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사실 슈퍼스타 반열까지 오르진 못했다. 그러나 차두리는 한국 축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됐다. 축구대표팀이 2002년 한ㆍ일월드컵(4강)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원정 16강), 2015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할 때 차두리는 각각 막내로, 중고참으로, 맏형으로 역할을 달리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반면 차범근은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는 1979년부터 89년까지 10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308경기에 출전해 98골을 뽑아냈다. 1981-82시즌부터는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차붐'과 '갈색폭격기'라는 별칭을 얻었다. 특히 85-86시즌 34경기에 나서 17골(경기당 0.5골)을 터뜨리며 득점 4위에 올랐다.
당시 분데스리가의 위상은 오늘날 유럽축구연맹(UEFA) 리그 랭킹 1위 프리메라리가(스페인)와 맞먹는다. 그 시절 유럽클럽대항전 상위팀들은 대부분 독일 클럽이었다. 기량이 만개하지 않았던 79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했을 때 차범근은 한화 6,000만 원 이상을 받았다. 분데스리가 선수들 평균 연봉의 약 4배에 이르는 금액이었다.
이날 시즌 마지막 슈퍼매치에서는 '우리에겐 두리>차붐'이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여기에는 선수 황혼기에 서울 유니폼을 입고 3년을 뛴 차두리에 대한 고마움과 '적장'이었던 차범근 전 수원 감독에 대한 원망이 깃들여 있다. 차두리는 "아버지는 한국 축구를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 박수 받을 만하다. 다만 서울 팬들 사이에선 내가 더 위대한 선수로 남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고 말했다.
차범근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말을 보여준 선수다. 차두리에게는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는 말이 어울린다. 서구사회에 대한민국의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차범근이 파독 광부나 간호사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됐다면 차두리는 서울과 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았던 이 시대 축구계의 든든한 '터미네이터'였다. 축구인생이나 살아온 방식은 확연히 달랐지만, 부자(父子)가 한국 축구의 빛나는 이정표를 세운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진=차두리(왼쪽)-차범근(프로축구연맹 제공).
박종민 기자 mini@sporbiz.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