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대학 대학원 수업 과제물로 ‘타임머신을 설계하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었다. 정답이 없는, 오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 과제를 내면 학생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미래로의 시간여행은 어렵지 않다. 빠른 속도로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오거나,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중력이 아주 강력한 천체 근처에 갔다 오면 미래를 볼 수 있다. 각각 특수상대론적 효과와 일반상대론적 효과 때문에 시간이 느려지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간단하지 않다.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는 수학적 풀이가 다수 존재한다. 4차원 시공간 속의 서로 다른 점을 고속도로처럼 연결하는 웜홀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하지만 수학적 풀이가 항상 물리적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인과율이다.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이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없으면 할아버지는 죽을 일이 없다. 이른바 할아버지 모순이다. 영화 ‘터미네이터’나 올 초 개봉한 ‘타임 패러독스’는 시간여행의 이 역설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든 인과율은 지키고 싶어 한다. 스티븐 호킹 같은 과학자는 우리가 아직 잘 모르는 과학적 원리가 과거로 돌아가는 수학적 풀이를 배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확립된 역사를 바꿀 수는 없게끔 제약조건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학생들의 재치 넘치는 과제물 중에 눈에 띄는 내용이 하나 있었다. 타임머신은 핵무기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물건이니 아예 개발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너도나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자기 입맛대로 과거를 바꾼다면 지금 현재에는 엄청난 혼란이 야기되지 않겠냐는 얘기이다.
만약 대한민국에 딱 한 대의 타임머신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의 특권층이나 권력층일 것이다. 2015년의 현실에서 그 타임머신을 가장 쓰고 싶은 사람은 아마도 ‘역사전쟁’의 선봉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10ㆍ26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기 위해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명시되지 않게끔 막았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어서 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하더라도 혼자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은 지금 우리 사회 전체를 1970년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지난한 민주화의 성과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기에, 이런 식의 시간여행이 유쾌할 리가 없다. 그래도 여기에는 우리가 개입할 여지라도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진짜 타임머신이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일관되게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헬조선’의 현실을 보면.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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