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잉주 대만 총통이 7일 싱가포르에서 양안 정상회담을 했다. 1949년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두 개의 중국으로 분단된 이후 66년만의 정상회담이다.
정상회담이 실현된 배경은, 장기적으로 보아서는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경제벨트)’ 정책을 야심 차게 추진하고 있는 중국과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탈피하려고 노력해 온 대만의 이해 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이다. 또, 당장 양쪽 모두의 급박한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성사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남중국해 분쟁에서 미국과 심한 정치, 군사적인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대만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이미 시진핑 주석은 지난 5일 베트남을 주석 취임 이후 처음으로 국빈 방문해서 베트남 국가 지도부와 양국 현안 및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했다. 베트남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당사국이기도 하다.
양안회담 ‘통일’ 위한 여러 길 중 하나
반면 내년 1월 총통 선거를 앞둔 대만 집권당 국민당으로서는 대만판 ‘북풍’의 힘을 빌어서라도 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국민당은 지난 10월 임시 전당대회를 열어서 총통 후보를 훙슈주 입법원 부원장(국회 부의장)에서 주리룬 당 주석으로 바꾸었다. 대선을 겨우 석달 앞두고 극약처방을 내린 셈인데, 홍슈주 후보로는 더 이상 민진당 대선 후보인 차이잉원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국민당 내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리룬은 2010년 신베이시가 직할시로 승격됨과 동시에 벌어진 시장 선거에서 차이잉원을 이긴 바 있다. 타이베이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신베이시는 대만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도시인데 이름 자체가 ‘새로운 타이베이시’의 약자로 만들어졌다. 유학파 회계학 교수였다가 정치에 입문한 주리룬은 아버지가 대륙 출신(외성인)이고 어머니가 대만 출신(본성인)이다.
그러나 마잉주 총통은 레임덕 상태인데다가 인기가 매우 낮기 때문에 양안 정상회담이 내년 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에게 승리를 안긴다는 보장은 없다. 타이베이시에서는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 대만 국민들은 과거 냉전 시기의 적대적 관계로 양안이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고 있다. 양안 정상회담이 일정한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며 동북아 전체의 평화적인 공존과 교류에 있어서 역사적으로도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틀림없다.
중국ㆍ대만 정상회담은 소위 ‘하나의 중국’으로 가는 ‘많은 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최고위급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공식적, 정치적 교류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늘 소개하는 왕차오화는 그 ‘많은 길’ 중에서 중국 대륙 집권 체제의 공식 노선과는 아주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국의 비판적 여성 지식인이다.
톈안먼 운동 후 미국 망명한 왕차오화
왕차오화(王超華)는 1952년생으로 한국 여성으로는 대통령 박근혜 및 가수 양희은과 동갑내기다. 그녀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에서 학생운동의 핵심 주역이었다. 다섯 살 난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는 당시 37세로 중국 국무원 직속의 최고 학술기구이자 싱크탱크인 중국사회과학원의 대학원생이었다.
왕차오화는 중학생 시절 홍위병 활동을 했으며 홍위병으로서 그녀는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였던 아버지 왕야오(王瑤)를 내놓고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자신은 훗날 이 일을 크게 반성하게 된다. 그녀의 대학 전공은 건축 설계였고, 신문사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87년에 중국사회과학원에 들어가서 문학을 전공하게 된다.
톈안먼 사건 때 학생들을 대표하는 상설 조직의 지도부에서 활동하던 그녀는 누적된 피로로 인해서 6월 4일의 무력 진압 바로 전날 병원에 입원했다. 그 덕에 체포를 피할 수 있었지만, 곧바로 중국 경찰에 의해 전국 지명수배를 당하게 된다. 그녀는 21명의 수배자 명단 중 14번째에 올랐는데, 지명수배령은 다음과 같았다: “왕차오화. 여성. 37세.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생. 신장 163㎝ 정도. 마른 체형. 얼굴형은 긴 편. 얼굴색은 검고 누런색. 삼각형 눈. 단발.”
왕차오화는 6개월 동안 도망 다니다가 마침내 1990년 초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성공한다. 그 뒤 그녀는 주로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면서, 번역과 통역 등의 일과 중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톈안먼 사건 관련 자료를 정리하고 소개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했다. 1994년에 석사를 마친 그녀는 2009년 UCLA에서 ‘아시아 언어 및 문화’ 과정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 학위 논문은 5ㆍ4운동 당시 베이징대 학장이었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를 다루었다.
그녀의 부친 왕야오는 1914년생으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양쪽에 두루 밝은 중문학자였으며 1950년대 초에 간행한 ‘중국 신문학 사고’는 중국 현대문학의 연구 영역을 개척한 노작으로 알려져 있다. 왕야오의 제자로는 오늘날 한국에도 잘 알려진 첸리췬 등이 있는데, 첸리췬은 왕차오화의 언니 왕차오빙 등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 30년’을 펴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왕차오화는 아카데믹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셈이다. 왕야오는 1989년 딸의 수배 사건으로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왕차오화의 어머니는 그녀가 미국으로 망명한 다음에 영국으로 이민을 갔다.
“변혁에 중요한 건 대중의 자기해방능력”
비록 중국 밖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의 대표적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해야 할 왕차오화는 중국의 금기인 1989년 톈안먼 사건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통해서 오늘날의 중국 사회를 해부하고 또 중국이 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그녀가 편집해낸 책이 ‘하나의 중국, 여러 개의 길’(2005년)이다. 신좌파 지식인 및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글을 모아서 영어로 펴낸 책이다.
톈안먼 사건을 보는 왕차오화의 입장은 소위 신좌파의 견해와도 다르고 서구식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우파적 견해와도 다르다. 신좌파는 톈안먼 사건이 기존 사회주의 체제의 집단적 복지를 와해시키는 자본주의적 타락에 대한 대중들의 사회적, 경제적 저항이었다고 보며, 반면에 우파적 자유주의자들은 톈안먼 사건에서 대중들이 바라고 있었던 것은 소위 자본주의적 시장과 투표함이었다고 본다.
왕차오화는 이 두 가지 견해 각각이 어느 한 쪽 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1988년 여름 이후의 급격한 인플레로 인한 경제적 불만 때문에 학생들의 시위가 폭넓게 지지 받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 불만이 곧바로 정치적 시위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게 왕차오화의 견해다.
한편, 우파적 자유주의자들과는 달리 왕차오화는 톈안먼 사건에서 대중들의 자기해방 능력을 강조한다. 당시 실제로 중요한 요구는 언론의 자유, 공민의 권리, 시민 참여 등의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회운동이 급격히 분출하면서 급작스럽게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은 1949년 이래 전례 없는 언론의 자유를 누렸고, 다양한 사회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고 토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따져보면 운동의 이념도 갖가지였는데, 예컨대 미국에 대해서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비판적이거나 적대적인 견해도 있었고 또 반면에 미국을 이상으로 삼는 견해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당시 톈안먼 광장에서 민주의 여신상 아래에서 붉은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왕차오화는 들고 있다.
1989년 톈안먼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은 어떤 특정한 체제론적 입장이나 이러저러한 지도부의 이념적 언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왕차오화는 지적한다. 당시 중국 체제의 상층부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고 있던 자부심, 즉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능력을 가졌다는 대중들의 정치적 자부심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확실히 중국 혁명과 사회주의적 과거로부터의 유산이라는 게 왕차오화의 강조점이다. 왕차오화는 이런 연장선에서 소위 ‘중국식 사회주의’라는 슬로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문화대혁명의 경험, 또 거슬러서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사회적 변질 과정으로부터 심층적으로 접근을 해야만 톈안먼 사건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문화대혁명은 내년에 50주년을 맞는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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