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이 분단 이후 66년 만에 첫 정상회담을 7일 개최하기까지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한 각종 '최초' 사건들이 있었다.
양안은 1949년 분단 이후 30년간 '봉쇄정책'을 폈다. 그러다가 1970년대 말을 시작으로 교류·협력을 위한 점진적인 조치를 취해 66년만에 역사적인 정상회담까지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반관영 통신사인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이 이날 소개한 첫 기록들에 따르면 1979년 1월 1일 중국 전인대 상무위원회가 '대만 동포들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발표문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이란 큰 방침을 천명했다.
이는 양안 관계의 '이정표'가 되는 대사건이었다고 통신은 의미를 부여했다.
1987년에는 대만이 '탄친(探親)법'을 제정, 중국 내의 친척 방문을 허용했고 중국 국무원도 이에 호응함으로써 1949년 이래 38년간 막혀있던 양안 동포간의 인적 왕래의 물꼬를 텄다.
1992년 11월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와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가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서로 각자의 해석에 따른 국가 명칭을 사용키로 하는 내용의 '92컨센서스(92공식·九二共識)'에 합의했다.
이듬해인 1993년에는 싱가포르에서 왕다오한(汪道涵) 해협회 회장과 구전푸(辜振甫) 해기회 이사장의 이른바 '왕-구 회담'이 개최된다.
이는 두 단체의 첫 최고위급 회담이었고 분단 40여년만에 열린 고위인사 간의 첫 직접 접촉이기도 했다.
2005년에는 국공(국민당-공산당) 영수간의 첫 회담이 개최됐다.
당시 롄잔(連戰) 국민당 주석은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징(北京)을 처음으로 방문,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공산당 총서기와 첫 국공 영수회담을 열었다.
2008년 6월에는 천윈린(陳云林) 해협회 회장과 장빙쿤(江丙坤) 해기회 이사장이9년만에 처음으로 양안간 공식대화를 재개했다. 해협회와 해기회간 채널은 이후 11번의 지도부 회담과 23건의 합의문을 도출함으로써 양안 관계 개선을 이끌게 됐다.
통신은 2008년을 양안이 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신(通信) 교류의 역사적인 '대삼통'(大三通) 시대를 연 해로 꼽았다.
2010년에는 양안이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하면서 경제교류를 제도화했고, 2011년에는 대만이 중국 유학생들의 대만 유학을 허용, 인적 교류의 수준도 높아졌다.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후에도 양안은 각종 '최초' 교류를 했다.
장즈쥔(張志軍) 중국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과 왕위치(王郁琦)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 주임위원은 지난해 2월 상하이(上海)에서 첫 당국간의 장관급 회담을 개최했고, 장즈쥔 주임은 넉달 이후 첫 대만 방문길에도 올랐다.
올해 7월에는 중국이 대만인의 중국 방문시 요구해 온 입경허가증(비자)을 면제하는 조치도 취했다.
시 주석은 올해 5월 현재 국민당 대선후보인 주리룬(朱立倫) 국민당 주석, 올해9월 전승절 열병식에 참석한 롄잔 국민당 명예주석과도 회담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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