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라면의 인은 혓바닥이 아니라 정서 위에 찍힌 문양과도 같다.”소설가 김훈은 신간 ‘라면을 끓이며’에서 라면에 끌리는 이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한국인과 라면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반세기가 넘도록 서민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라면의 문화적 가치를 3회에 걸쳐 재조명한다.
"지금 라면을 끓이는 건 쉽다. 그런데 일어나서 라면 끓이러 가느냐의 의사 결정이 정말 힘든거다." 지난 3월17일 오후 11시47분,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그룹 회장)은 트위터에서 '라면앓이'를 고백해 화제가 됐다. 늦은 밤 허기를 달래줄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건 '수저 계급론'을 뛰어 넘는 공통의 경험이다.
누구나 즐기는 저렴한 음식인 라면. 1963년 1봉지에 10원이던 라면(삼양라면 기준)은 2015년 현재 76배 올라 760원이다. 정부 물가안정화 정책의 대표 품목이어서 한끼 때우는 용으로는 싼 편이다. 오랜 시간 서민의 먹거리였던 라면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일까. 760원짜리 라면의 미학을 살펴보았다.
● "○○라면의 맛은 ★점"
블로그 '라면정복자피키'를 운영하는 대학생 지영준(26·청주교대2)씨는 자칭 라면전문가다. '라면완전정복'을 목표로 지난 2년간 300여가지가 넘는 라면의 맛을 주제별로 비교해 별점을 매겨 글을 올리고 있다. '편의점 라면' '김치라면' '군대인기라면' '특산물 라면 ' 맛집 라면' 등 주제별로 시판 라면을 맛과 호감으로 나눠 평가해 점수를 준다. 호감도는 가격, 용기재질, 영양성분, 구입처 등을 고려한 결과다.
지씨에게 영감을 준 건 미국의 라면전문 블로거 '한스 리네시'. 지씨는 "라면의 장점과 단점을 꼼꼼히 비교한 한국 블로그는 없는 것 같아서 취미 삼아 시작했다. 맛은 주관적인 기준일 수 있어서 호감 점수로 이원화해 꼼꼼히 평가하고 있다"면서 "최근에는 스코빌지수(매운맛 평가)와 나트륨, 포화지방 함량, 면발의 굵기 등을 따진다"고 말했다.
지씨처럼 열성적이지 않아도 라면 맛을 꼼꼼히 비교하는 소비자는 늘고 있다.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라면 순위'를 입력하면 관련된 블로그 게시물만 약 3만 9,000여건이다. 고가의 제품과 달리 누구나 구입해서 평가할 수 있어 호응이 높다.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채널들까지 PB라면 생산에 나서 라면의 종류가 다양화 됐고 평가의 재미도 늘었다.
● 1인 1레시피… 모디슈머의 시대
공산품 라면은 맛 평가의 대상뿐 아니라 훌륭한 요리재료로 변모하고 있다. 2013년 한 TV프로그램에서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은 일명 '짜파구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소비자들이 직접 조리법을 창안하며 ‘모디슈머(modify+consumer)’ 열풍이 시작됐다. 모디슈머들은 기존 레시피에서 벗어나 각자의 기호에 맞게 라면을 섞어 먹거나 새로운 조리법을 개발해 SNS(사회관계형서비스)나 인터넷 블로그 등에 사진과 글을 올려 공감을 얻는다. 이제 ‘나만의 레시피’는 개인 블로그의 핵심 내용이자 일상생활의 주요 대화거리로 자리잡았다.
라면 레시피는 다양하다. 유명 셰프들이 차려낸 음식은 따라 만들기 어렵지만, 760원짜리 라면 1봉지는 초보들도 쉽게 요리할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양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라면을 끓여 비교 평가하고 별점을 매기고 다양한 레시피를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가 감각적인 소비를 하고 싶어하는 SNS 세대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라며 “습관성 구매 제품이어서 식상했던 라면에도 나를 투영하는 적극적인 소비자가 많아진 결과”라고 말했다.
‘집밥’을 기대하기 힘든 바쁜 일상에서 라면을 끓일 때만큼은 요리사를 자청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회사원 이재훈(30)씨는 "KBS2TV '해피투게더-야간매점' 코너에서 유명 연예인들이 소개해준 방법을 따라 라면을 끓여 먹다가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며 " 요령이 생긴 후엔 레시피를 개발해 SNS로 인증샷을 올리는데 나름 집에서 먹는 식사라 결과물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 사이
'라면은 유해한가, 이로운가'를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지난해 소비자원이 라면의 영양 성분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탄수화물·지방·단백질 등 영양성분의 양과 포화지방·나트륨·칼슘·캡사이신·MSG 등의 함량은 제품에 따라 최대 50% 이상 차이가 있었다. 라면 한 봉지에 들어있는 포화지방은 하루 권장 섭취량의 절반을 넘는 제품도 있었고, 나트륨이 하루 권장 섭취량의 86% 이상인 경우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라면이 고열량·고지방 인스턴트 식품”이라며 “나트륨 과잉 섭취로 골다공증·고혈압·심장병·뇌졸중·위암 등이 우려되는 음식”이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라면의 해로움이 과장됐다는 의견도 있다.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찬일 셰프는 "인스턴트가 몸에 해롭고 정서적으로 좋지 않다는 면은 분명하지만 이는 라면뿐 아니라 인스턴트 식품에 보편적으로 해당하는 얘기"라며 "식품에 대한 소비 불안이 커지면서 현재 시판 라면엔 MSG와 방부제가 들어있지 않음에도 여타의 식품에 비해 유해성이 과장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오늘도 "라면이 건강에 이롭지 않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은 각종 부재료를 라면에 첨가하며 죄의식을 달랜다. 라면 스프는 반만 넣고, 각종 야채를 넣고, 계란을 푸는 식이다. 그래도 라면을 먹는 이유는 뭘까. 호주의 사회학자 데버러 럽턴은 저서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에서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 자연음식과 인공음식의 대립은 불확실성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라며 “문명 자체가 질병과 건강악화의 주요 원인으로 인식되는 시대에 건강에도 안 좋은 음식을 굳이 찾아서 먹는 건 위안과 편안함,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라며 이라고 설명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조영현 인턴기자(한국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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