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건강했던 사람에조차 기왕증 빌미 감액 지급 일쑤
이미 지급한 치료비 반환 소송까지… 피해자 두 번 울려
“어지럼증이 나 병원 문 밖을 못 나가네. 우리 딸도 거둬야 하고, 후딱 집에 가야 쓰겄는디….”
오영희(60)씨는 2013년 10월 교통사고 후 경추골절로 거동이 불편하다. 병원을 전전하다 올 2월부터는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있다. 응급 수술 후 한 달간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유증으로 일종의 착란인 섬망 증상이 생겼다. 연신 머리를 짚던 오씨는 누가 얼마를 떼어먹었다는 등 딴소리를 하기도 했다.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병색이 깊었다.
오씨는 전북 김제시 봉남면 마을 밭에서 일군 옥수수 등을 내다 팔아 생계를 꾸렸다. 선천성 시각장애 1급인 오씨는 가까이 있는 사물 형체만 희미하게 인식할 정도로 눈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50년 넘게 다닌 김제의 시장길이 훤했다. 사고가 난 날도 혼자 제수용품을 장만하러 장을 찾았다가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좌회전하던 승용차에 받혔다. 오씨는 당시 상황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눈이 잘 안 보여 길가로만 다녀 사고 한 번 안 났제. 애기 셋 키울 땐 병원을 다녀도 사고 한 번 안 났는데, 시장 사람들은 그 놈의 차가 나를 밀었다고 하대.”
사고 후 가해차량이 가입한 보험사는 오씨가 주위를 살피지 않았다며 손해배상금을 줄 수 없다고 통보했다. 치료비마저 막막해진 막내아들 최재호(31)씨는 소송을 제기, 법원의 화해 권고를 이끌어 냈다. 그런데 이번엔 보험사가 반소를 걸어왔다. 사고 10개월 후인 2014년 5월이다. 보험사는 기왕증 기여도가 70%로 판정이 난 만큼 그동안 지급한 치료비 6,000여만원 중 약 5,000만원을 물어내라는 ‘부당이득금반환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보험사 관계자는 “과거 골절이 있었거나 치상돌기(제2목뼈에 있는 이빨 모양의 돌기) 문제가 있다가 사고로 인해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사 감정서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는 사고 기여도를 30%로 봤다.
그러나 아들 최씨는 과거 경추골절 치료 전력도, 흔한 골다공증도 없이 건강했던 사람에게 기왕증 기여도가 70%라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렇게 아픈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고 시장을 다닐 수 있었을까요. 사고도 억울한데 5,000만원이나 물어내라니요.” 경추골절의 경우 골다공증이 심하지 않으면 기왕증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법원 판례가 있으나 최근 오씨와 비슷한 사례가 꽤 늘고 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오씨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의료비 지원 대상자다. 애초 건강보험으로 치료를 받았다면 거의 본인부담금 없이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 시스템상 자동차보험으로 치료를 받으면 중간에 이를 돌리기가 쉽지 않다. 법원 소송 결과에 따라 오씨는 살고 있던 집에서도 내쫓기게 될 딱한 사정이다.
“기왕증 판례가 잘못인지, 보험사가 횡포를 부리는 건지….” 사고 처리 과정과 법정 다툼에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는 최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청회 등을 통해 수년 째 기왕증의 불합리성을 주장해 온 한문철 변호사는 기왕증으로 보상이 깎인 가입자(피해자)가 20만명쯤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한 변호사는 “의뢰인 중 기왕증 기여도 50% 판정을 받았다가 30%로 낮춰지기도 하는 등 판단은 그야말로 의사 나름”이라면서 “분쟁 소지가 적지 않고, 의학적 지식이 없는 가입자에게 불리한 요소가 많은 만큼 기왕증 판정과 정도를 엄격히 하도록 당국이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제=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기왕증(旣往症) 기여도란
과거에 앓았거나 현재 있는 질병, 즉 기왕증이 사고 후유증 또는 새 질병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느냐는 정도를 뜻한다. 보험사는 보험금 지급 시 가입자(피해자)의 기왕증 기여도에 따라 보상금을 삭감한다. 예컨대 사고 후 총 진료비가 1억원이 나오고, 기왕증 기여도는 70%로 판정 받았을 때 가입자는 3,000만원만 보상받게 된다. 가입자 과실이 있을 경우 이와 별개로 또 삭감된다. 기왕증은 법원 판례에서 인정하고 있지만 종류, 정도에 대한 정립된 이론이 없고, 의사마다 판단이 달라 분쟁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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