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 쏟아지는 약관, 분량 두껍고 이해 못할 용어만
보험설계사도 일부만 설명… 약관 오탈자로 보상거부 사례도
정부, 자율성 확대 명목 표준약관 폐지 최근 공표
“약관 일부러 말 꼬아 면피할라” 우려 커져
한국은 건강보험제도가 꽤 잘돼 있지만 민간보험 가입률 역시 상위권이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보험료가 지난해 전 세계 4위(11.3%)에 해당한다. 민간의료보험 가입가구는 전체 가구의 80% 이상이다. 가구당 월 평균 보험료로 34만3,488원을 지출했을 정도다. 그러나 소비자가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많다. 그 중 하나가 약관이다.

어려운 약관에 우는 소비자 많아
실제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민원 사례 중에 약관 관련 비중이 높은 편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망막병증과 녹내장 관련 레이저 섬유주 성형술을 받은 한 민원인은 약관상으로 녹내장 관련 수술의 직접적 연관성이 없고 비급여 항목이라는 보험사의 판정에 따라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그러나 소비자보호원은 녹내장이 당뇨와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수술비 8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조정결정을 내렸다. 보험관련 분쟁 시 금융감독원이나 소비자보호원에 민원이 제기되면 조사나 중재를 거쳐 통상 합의 권고를 하지만 안 될 경우 분쟁조정위원회를 거쳐 조정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보험사가 거부할 경우 강제 수단이 없어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약관을 잘 따져 봤더라도 소용이 없는 경우도 생긴다. 보험증권 및 약관에 구급차로 병원에 후송돼 응급치료를 받을 경우 1회당 10만원의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조항만 믿었던 한 가입자는 보상을 거부한 보험사 때문에 크게 황당했다. 보험사는 ‘보험증권상의 오탈자나 착오로 인한 오기재’라면서 보험증권은 하나의 증거증권에 불과할 뿐이라 이행 책임이 없다고 잡아떼 소보원에 구제를 신청하기도 했다.
약관 자체가 소비자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다는 것도 문제다. 전직 보험설계사 김모(35)씨는 가입 시 약관을 꼼꼼히 따지는 소비자는 100명 중 1명도 안 된다고 했다. 김씨는 “책처럼 두꺼워 적어도 한 시간 이상 설명해야 하는데 다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어 대부분 보상하지 않는 손해나 지급기준 등 중요 부분만 설명하고 넘어간다”며 “약관이 지나치게 어려운 용어를 써 일반인들은 물론 보험 설계사들도 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김씨는 특약 관련해서는 함정이 많기 때문에 소비자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보험설계사들이 제대로 설명을 해 주는지 여부도 문제지만, 소비자 역시 보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해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는 부분이 상당하다. 대표적인 예가 임플란트다.
2002년 종신보험에 가입한 직장인 A(49)씨는 3년 전 300만원을 들여 임플란트 이식을 한 뒤 보험 적용이 되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보험사에 보상 청구를 했다. A씨는 “보험설계사가 가입 당시 임플란트 얘기를 했는지, 말았는지 기억에 없다”며 “모르고 있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라고 말했다. 임플란드 이식수술 후 2년 이내 청구라는 소멸시효가 있어 A씨는 분쟁 상황까지 걱정했지만 보험사로부터 비용 일부를 지급받았다. 임플란트 시술은 2종 수술에 해당하는 골이식 항목에 해당된다. 그러나 따로 임플란트라고 적혀 있지 않아 일반인들이 알기 힘들다. 수술 1회당 지급이라 여러 치아를 한꺼번에 할 경우 보상 범위도 치아 한 개로 확 줄어들지만 가입자가 이를 세세하게 알기 어렵다. A씨는 “여러 개 치아를 임플란트 해야 할 경우 이식 날짜를 달리 하라고 조언하는 보험설계사가 몇이나 되며, 이를 기억하는 소비자가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더욱이 임플란트 시술이 활성화되면서 비용이 많이 나가자 보험사들이 2000년대 후반 관련 조항을 삭제해 최근 가입자들은 적용을 받지 못한다.
업계 날개 달아주면서 표준약관은 폐지
지금 약관도 알기 쉽게 소비자 중심으로 만들어야 할 판에 더 난해하고 불리하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부가 보험사의 상품개발 자율성을 확대한다는 명목으로 표준약관 폐지 방침을 최근 공표했기 때문이다. 보험료 산정 근간이 되는 위험률 조정한도와 상품 출시 전 사전 심사 역시 폐지된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기존에는 금융당국이 시행세칙(표준약관)을 정하는 등 여타업종에 비해 규제가 촘촘해 상품 개발에 한계가 컸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1993년 보험가격 자유화 이후 획기적인 규제 개선안으로 받아들이지만 소비자에게 더 불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박지호 경실련 소비자정의센터 간사는 “경쟁력이라는 용어에 사로잡혀서 표준약관을 없애고 자체검정으로 모든 상품을 팔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소비자 피해가 불 보듯 뻔하다”며 “가뜩이나 어려운 약관을 일부러 꼬아 놓아 책임을 면하려 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금융당국이 엄격한 규제를 뒀던 것에서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약관을 고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것이다. 김석영 보험연구원 연구위원도 “약관을 만드는 기준을 없앤다는 것으로 계약자 입장에서 위험성이 높아진 것은 맞다”며 약관을 지금보다 꼼꼼히 살펴야 한다고 당부했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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