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좀비, 흡혈귀 대신 초과학 존재 몰입
엑소시즘 실황 생중계하기도
관련 영화, 드라마 줄이어 등장
내재된 적과의 갈등
공포물 주 소비층은 10대 청소년
죄책감 줄이려 ‘죄악’ 외부서 찾아
악령 퇴치 관심 많은 교황 영향도
핼러윈을 하루 앞둔 지난달 30일 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한 저택에 일군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각종 TV쇼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탄 심리 상담가 칩 코페이, 그리고 신부 한 명이 그들 틈에 섞여 있었고 조명, 카메라 등 ‘방송’을 위한 장비들도 함께였다. 이곳은 1973년 제작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공포영화 ‘엑소시스트(Exorcist)’의 실제 모델인 롤란드 도(Roland Doeㆍ가명ㆍ당시 13세)가 귀신에 들린 당시(1949년) 살았던 집이다. 비록 그에 대한 엑소시즘(귀신 쫓기 의례)이 이곳에서 이뤄지진 않았지만 롤란드를 괴롭힌 악령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지면서 미국의 ‘공포 애호가’들에겐 성지와 같은 곳이 되었다. 코페이 일행은 30일 이곳에서 70여년 만에 실제 엑소시즘을 시행하며 케이블TV에 실황을 ‘생중계’했다. 충격적인 영상을 기대하며 벌어진 초유의 방송 실험은 그러나 실패로 끝났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미 엔터테인먼트 업계와 관련 언론들은 핼러윈 기간 내내 ‘2015년의 엑소시즘’에 들썩였다. 그리고 미 대중문화의 중심지 할리우드는 30여 년 전 공포 코드인 ‘귀신 들림’으로 서서히 회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엑소시즘으로 다시 들썩이는 할리우드
‘롤란드의 집’에서 벌어진 엑소시즘을 실시간으로 중계한 시도는 그만큼 최근 미국 대중이 좀비와 흡혈귀 등 정체가 그나마 눈에 보이는 공포보다 실제를 가늠할 수 없는 초과학적인 존재, 즉 악령이나 귀신에 점차 몰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누구보다 대중의 기호에 빠르게 대응하는 할리우드가 이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할리우드가 귀신 들림에 대한 스토리로 회귀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흡혈귀, 늑대인간, 그리고 좀비 등이 귀신 들린 캐릭터에 의해 무대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전했다.
연말과 내년 초를 전후해 미국 스크린에는 다양한 ‘귀신 들림’ 영화가 내걸릴 예정이다. 2013년 제작비 2,000만달러를 들여 전 세계적으로 3억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제임스 완 감독의 엑소시즘 영화 ‘컨저링(The Conjuring)’의 속편이 현재 제작 중이다. 악령이 깃든 집과 가족에 얽힌 실화를 다룬 작품으로 ‘엑소시즘’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오컬트 영화로 꼽힌다. 내년 2월 미국에서 개봉 예정인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더 위치(The Witch)’는 올해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으로 1630년대 미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숲 속에 사는 청교도 가정이 악령이 깃든 자연에서 겪게 되는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
귀신과 악령에 들린 사람들을 다루는 대중문화의 오컬트(Occult) 트렌드는 비단 스크린에만 머물지 않고 있다. 17세기 후반 미 세일럼에서 벌어진 마녀 재판을 둘러싼 인간의 광기와 그 후면에 사린 악귀의 실체를 1950년대 미국에 몰아친 매카시즘과 빗대어 보여준 아서 밀러의 ‘크루서블(Crucibleㆍ국내 번역 제목은 ‘시련’)’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연극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2월 막을 올린다.
미 폭스(FOX)사가 내년부터 방송하는 드라마 시리즈 ‘아웃캐스트(Outcast)’는 어려서부터 귀신이 몸에 깃든 한 청년이 스스로 탈출구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며 벌어지는 사건들을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이 작품의 연출자는 좀비 드라마 ‘워킹 데드(Walking Dead)’시리즈로 2013년부터 미 대중문화계를 주름잡은 로버트 커크만 감독이다. WSJ은 공포물의 메인 트렌드가 좀비 등 괴물에서 인간에 깃든 귀신으로 넘어가고 있는 사례를 커크만 감독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 스타즈(STARZ) 채널에서 지난 30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애쉬 vs 이블 데드(Ash vs Evil Dead)’는 1980년대 초반 B급 공포영화의 대표격이었던 영화 ‘이블 데드(Evil Dead)’의 30년 뒤 이야기를 담은 것으로 역시 격투의 상대는 ‘악령’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인기도 오컬트 붐에 한 몫
미국 영상업계가 이처럼 오컬트 장르에 새롭게 치중하는 것은 공포물의 주 소비층이 10대여서다. 바이럴(소문 전파 능력)이 다른 연령층에 비해 훨씬 뛰어난 10대야 말로 인간의 몸이 불명확한 존재에 의해 손쉽게 조정 당할 수 있다는, 어쩌면 허무하고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는 소비자들이기 때문이다. WSJ은 “내재된 적과 갈등한다는 점에서 오컬트 영화 속 귀신 들림은 좀비나 뱀파이어와의 투쟁보다 개인적인 소재가 될 수 있으며 이를 최근 10대들이 경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더불어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향도 적지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국제 엑소시스트(퇴마사)협회’를 공식적으로 인증할 정도로 악령 퇴치에 대한 관심이 과거 어떤 교황보다 크다. 교황청의 엑소시즘을 소재로 한 영화 ‘바티칸 테이프(The Vatican Tapes)’를 연출한 마크 네빌딘 감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엑소시즘에 대한 대중적인 열광을 이끌어낸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교황청의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토마스 로시카 신부는 “교황은 악령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악령을 다룬 공포물은 대체로 인간성의 가치가 떨어지고 도덕의 준칙들이 무시되는 시대일수록 인기가 높아진다는 분석이 있다. 죄악을 일으키는 존재를 ‘나’가 아닌, 상상 속에 존재하는 ‘악령’으로 가정할 경우 그만큼 죄책감은 적어진다. 사회가 곪을수록 이 같은 방식의 생각은 보편화된다는 얘기이다. 지난 여름 미국에서 출간된 엑소시즘 관련 소설 ‘어 헤드 풀 오브 고스트(A Head Full of Ghosts)’의 저자 폴 트렘블레이는 “오컬트나 스릴러 작품을 즐기는 사람들 가운데 초과학적인 존재를 설정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라며 “나쁘고 끔찍한 상상이나 행위를 하고도 책임감은 느끼지 않는 기묘한 상태를 알게 모르게 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고 밝혔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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