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김채원의 중편 ‘쪽배의 노래’에는 쉽게 잊기 힘든 장면이 있다. 소설의 여성 화자는 지금 아주 오래 전 유년기를 보낸 옛집의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 그 무렵의 봄날, 고등학교 2학년 때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떠나갔던 오빠는 휴전이 되면서 집에 돌아와 있다. 무너져가는 집의 가족은 넷. 두 아이와 오빠,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는 전쟁 중 북으로 끌려갔다.
봄날 어스름한 저녁의 정경이 떠오른다. 창호지문을 등 뒤로 하고 서서 오빠는 영화 줄거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녁 밥상을 물린 직후인지도 모른다. “방 안은 어스름에 잠겨 있고, 식구들은 방바닥에 누워 이야기를 듣는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몸은 부피감 없이 방바닥에 납작하게 붙여 있다. / 늘 그런 구도였다.” 이 이상한 구도. 왜 오빠는 그렇게 창호지문 저편에 등을 지고 서서 이야기를 했던 걸까. 그리고 다른 식구들은 방 안에 누워 있고. 그 봄날 저녁 오빠의 이야기 소리가 반세기의 시간을 넘어 들려온다. “셰인, 돌아오라고 말이야.” 다시 한번 이상하다. 지금 여자의 눈에는 이야기하다 빙긋이 웃는 오빠의 표정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문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때는 보지 못했던, 아니 볼 수 없었던 오빠의 얼굴이. 방 안을 감싸 안고 있던 안온함과 고요, 한없는 부드러움까지. “그때 그 방 안은 너무 부드러워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인 듯했다.”
그러다 여자는 깜짝 놀란다. 그때가 눈 깜짝할 시간에 지나간 한 젊은이의 청춘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들 눈에는 전쟁 후에 나타난 오빠가 집에 온 손님처럼 어른처럼 비쳤고,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던 것이다. 처음부터 어른인 사람인 양. 그러나 고작 스물한 살! “얼마나 어린 청년이었는가.” 생각해보면 육친조차 타인이었다. 그때 오빠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매 순간 자기 앞의 시간을 살 수밖에 없었고, 그 나날의 시간 속에서 오빠의 시간은 정작 기억 속에 편리하게 봉인되어 있지 않았을까. 여자는 뒤늦게 가슴 아파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그 스물한 살의 눈동자가 이제야 여자에게 생생히 체험되어온다. 아코디언을 켜고 팝송을 좋아하던 오빠는 대학을 나와 공무원이 되었다. ‘패기가 없다’는 이유로 사귀던 여대생의 집안으로부터 결혼을 거절당하기도 한 오빠는 술을 좋아했고, 그러다 반 양동이의 코피를 몇 번 쏟은 뒤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달랐던 오빠.
김채원의 ‘쪽배의 노래’는 그렇게 창호지문 뒤에 서 있던 오빠의 미소와 눈동자를 시간과 역사의 횡포, 인간의 나약과 무지로부터 되찾아오는 소설이다. 오빠가 세상을 떠났을 때 여자는 ‘자신이 오빠를 대신해서 살아주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니 어떠한가. 자신의 삶 또한 시간 속에 떠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김채원의 소설은 이 도저한 상실의 시간 속에서 기어코 보아낸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버텨낸 옛집이 ‘쪽배’가 되어 깊은 밤을 건너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기적의 광경을. 아주 가끔 어떤 소설은 시간을 버티고 버텨서 터져 나온다. 아주 조용히. 가히 명편이다.
정홍수ㆍ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1946년 경기 덕소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1975년 ‘현대문학’에 단편 ‘밤 인사’가 당선된 후 ‘겨울의 환’으로 제1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초록빛 모자’ ‘봄의 환’ ‘가득찬 조용함’ ‘달의 몰락’ ‘지붕 밑의 바이올린’, 중편소설 ‘미친 사랑의 노래’, 장편소설 ‘형자와 그 옆 사람’ ‘달의 강’, 장편동화 ‘장이와 가위손’ ‘자장가’, 자매 소설집 ‘먼 집 먼 바다’ ‘집, 그 여자는 거기에 없다’가 있다. ‘쪽배의 노래’는 작가가 11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책 속 한 문장
그러나 자신은 왜 어머니 같지 않은지 알 수 없다. 아이가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 어머니로 만들어주고 있음에도 어머니 같지 않았고 그것과 똑같은 이유로 인간, 여자, 아내, 연인, 그 아무것에도 그 이름이 적합지 않음을 느낀다.
그 이름에 가 닿기 위해 무엇이 모자라는 것일까.
- ‘등뒤의 세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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