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KBS는 1969년부터 방송된‘명화극장’을 전격 폐지했다. 45년 간 이어오던 이 더빙 외화 프로그램은 자막 영화가 일반화하고 시청률이 1%대로 떨어지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프로그램 폐지 소식에 시각장애인 단체가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영화관을 찾기 힘든 시각장애인들을 방송에서마저 배제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영방송이라면 상업성은 없어도 공익을 위해선 꼭 필요한 프로그램 제작을 사명으로 삼아야 하지만 상업방송과 똑같이 시청률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과학교양 프로그램 등으로 이름난 BBC와는 대조적이다. BBC는 자연 다큐 시리즈 ‘원라이프’에 무려 4년이란 제작기간과 400억원의 제작비를 들여 500만종 동식물의 극적인 순간을 담아냈다. 수익 계산상 응당 밑지는 제작이지만 2009년 방영 이후 ‘원라이프’는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고 세계 각국에 수출됐다.
KBS 수신료 인상 국민 설득하려면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은 공영방송에 이 같은 수준 높은 교양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 것처럼 느껴진다. 케이블ㆍ종합편성채널 등 채널은 갈수록 늘어 한정된 광고시장을 나눠가지는 환경에서 KBS와 MBC도 똑같이 시청률 경쟁에 매진해 수익을 내야 한다. 광고주의 관심을 잡기 어려운 사회적 약자나 소수를 위한 프로그램, 수준 높은 교양물, 기업의 이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내용이 간과되는 이유다.
공영방송을 정상화하기 위해 광고수익 의존도를 낮추고 수신료를 현실화하자는 주장이 그래서 늘 반복된다. 주정민 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광고수익 의존도가 지금처럼 높은 상황에서 공영방송의 공공성은 실현 불가”라며 “수신료라는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야말로 공영방송이 해결해야 할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KBS는 물론 국가나 상업자본으로부터 재정적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수신료를 걷고 있다. 하지만 총 재원 중 수신료 비중은 40% 정도에 불과해 광고(34.9%)와 큰 차이가 없다. 세계 최대의 공영방송사인 영국의 BBC와 일본 NHK는 전체 매출에서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각각 71.7%와 97%에 달한다. 당연히 이들 방송엔 광고가 없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고품격 콘텐츠 생산이 가능한 것이 바로 물가상승에 맞춰 인상되는 수신료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KBS 수신료는 1981년 책정 당시 그대로(월 2,500원)다. 이를 4,000원으로 현실화하자는 인상안이 지난해 5월 국회에 상정됐지만 1년 넘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돼 있다. 전문가들도 수신료 현실화가 필요하다는 데에 이견이 없지만 시청자들에게 수신료 인상을 납득시킬 만한 신뢰가 형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 위해선 공영방송들이 우선 공익적 방송 제작 노력을 보여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방만한 조직을 개선하는 자구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KBS 직원들의 평균 연봉(2013년 기준)은 1억원에 가깝다. 지난해 홍의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방송문화진흥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2014년 7월 현재 MBC 직원 1,420명 중 국장ㆍ부국장ㆍ부장ㆍ차장 등 간부 인력은 1,018명으로 전체 직원의 70%가 넘는다. 당시 방문진도 “바람직하지 않은 과다한 인력”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재원이 부족하다는 불만에 앞서 방만한 인력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만하다.
MBC “차라리 민영화” vs “해결책 아냐”
MBC의 문제 해결은 더 복잡하다. 특히 2012년 파업 이후 인사 파행과 내부 불신이 심각한 현 상황은 “차라리 민영화하라”는 목소리가 나오고도 남을 지경이다. 애초에 MBC는 공익재단인 방송문화진흥회가 대주주(지분 70%, 정수장학회가 30%)이면서도 광고수익을 재원으로 운영돼 ‘무늬만 공영’이라는 비판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다 최근 구성원들의 능력을 무시한 채 노조활동 등을 이유로 무리하게 해고와 징계, 소송을 일삼아 경쟁력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다. MBC 내부에서조차 “패소할 소송을 남발하고, 능력 있는 기자와 PD를 자르고 시용기자를 무더기로 채용하는 것은 주인 있는 회사였다면 해사 행위이자 배임”이라는 자탄이 나오고 있다. 김경환 상지대 언론광고학부 교수는 “2012년 파업 이후 MBC 경영진은 약 100명의 시용 인력을 채용했는데 이는 비효율의 극치”라며 “차라리 MBC를 민영화하고 KBS와 EBS에 공영방송의 지위와 힘을 더 실어주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민영화는 방문진과 정수장학회의 지분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특혜 논란 등 그 자체로 현실화하기엔 벽이 높은데다, 공영방송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많다. 주정민 교수는 “제2의 SBS 탄생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MBC 민영화가 현재 미디어 환경에서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며 “조직의 효율성이 다소 증가할 수는 있겠지만 방송 전반에 어떤 긍정적인 결과도 기대하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수익구조는 민영방송과 크게 다르지 않은 MBC가 지금의 소유구조에서나마 공영방송이란 책임감을 갖는 것”이라며 “(민영화가 되면) 프로그램의 오락화, 선정화가 가속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방송의 공공성과 경쟁력을 위해선 사회 전체의 관심이 필요하다. 김예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안정적인 재원과 합리적인 소유구조 마련이 공영방송 운영에 중요한 문제지만 아직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하고 있다”며 “공공성이라는 방송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반성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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