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유유백운룡문상이병
홍유는 중국도자기 중에서도 귀하다. 2014년 경매에서 1,260만위안(22억5000여만원)에 거래 됐다. 한술 더떠 홍유유백운룡문상이병(사진) 최상품의 경우 감정가가 200억원을 넘는다.
'홍유'는 동을 착색제로 한 유하홍색으로 원대 경덕진에서 제작되기 시작했으며 유리홍의 일종이다. 홍유는 완전히 우연의 산물로 출현했는데 당대 호남 장사요(長沙窯)에서 녹색을 나타내기 위해 산화동을 사용하였으나 소성 분위기의 영향으로 환원염이 출현해 홍색이 착색됐다. 이때부터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홍색자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명선덕연간, 선덕황제가 선홍색의 자기로 일신(日神)에게 제례를 올리고자 생각하여 경덕진에 제작을 명했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명 조정에서 만족할만한 제기를 제작하지 못했다. 감독관이 도공들을 닦달하여 일부를 옥에 가두고 성공하지 못하면 목을 치겠다고 협박했다. 늙은 도공의 딸인 '취란'은 이 소식을 듣고 어요창으로 가서 자신의 부친이 옥에 갇힌 것을 보고 분노에 떨었다. 취란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속으로 몸을 던져 목숨으로 명 정부에 항의했다. 이틀 뒤, 도공들이 취란이 몸을 던진 가마를 열어 젖혔을 때 신기하게도 소성된 기물이 모두 선홍색을 띠고 있었다.
이처럼 홍색의 제기가 완성되자 사람들은 취란의 피가 도자기를 물들였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홍색의 자기를 제홍이라 불렸다. 가마에 몸을 던진 취란을 기념하기 위하여 도공들은 이후로 가마의 구멍을 봉쇄 할 때 벽돌을 쌓아 소녀의 형상을 만들었다. 이 관습은 도공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후 역대 황제들이 제홍을 제작 시켰지만 아름다운 홍색의 자기는 신화전설의 보물처럼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경덕진도자관에 소장된 만여점의 소장품가운데 제홍은 9개와 절반이 있을 뿐이다. 절반은 명대 선덕연간의 제홍으로 파손되어 반만 남아있다. 이후 제홍의 기법은 실전되었다.
1982년 경덕진 시 정부에서 주산로에 전선을 매설하는 과정에서 명대의 색요유적지가 발견됐다. 색요는 어요창에서 전문적으로 안색유자기를 생산하는 가마다. 이 색요유적지에서 대량의 홍유자기 파편이 출토됐다. 홍유자기는 황제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으며 낙선된 자기는 깨트려 깊이 묻었다.
하남의 균요에는 '열에 아홉이 완성되지 못한다' 는 말이 있으며, 이것은 홍유 제작이 극히 어렵다는 말이다. 경덕진의 제홍은 균홍보다 더 제작하기 어려웠으며 민간의 구전에 따르면 '천개의 가마에서 하나를 얻는다'고 한다. 명대의 어요에서는 국가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만점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홍유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첸쩡샤는 '중한고미술협회'이사로 1,000여점의 중국도자기를 두루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C'는 중국도자기(Chinese ceramics)를 뜻한다.
채준 기자 doorian@spor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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