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224명의 사망자를 낸 러시아 여객기의 추락 원인이 테러일 가능성에 점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의 정보당국과 여객기 사고원인을 조사하는 항공 관계자들은 기내에 폭발물이 설치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 데 이어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테러리스트의 폭탄 설치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캐머런 총리는 5일 국가안보회의를 주재한 뒤 기자들에게 이집트 시나이반도 샤름엘셰이크 공항에서 영국 항공기 이륙을 전면 중단한 이유에 대해 “우리가 파악한 정보들은 사고가 테러리스트 폭탄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더 가깝다는 우려를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샤름엘셰이크 공항을 통해 영국인들을 귀국시키려면 더욱 강화된 보안 수준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이들을 귀국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미 정보당국 관계자는 4일 “이슬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소행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테러집단이 여객기에 설치한 폭탄이 터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여객기 출발지인 이집트의 샤름엘셰이크 공항에서 누군가가 여객기의 화물칸이나 다른 곳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라고 CNN방송에 밝혔다. 이 관계자는 “샤름엘셰이크 공항의 보안 허점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의 소행”이라며 “공항 관계자들이 가담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CNN은 중동소식통을 인용해 “여객기에 폭발물을 놓고 가는 장면을 누군가 봤다는 정보가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포스트도 러시아 항공관리자의 말을 인용해 사고조사단이 기내에 폭발물이 실렸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사고 원인은 폭발물이 기내에 실렸거나 기술적 결함 두 가지 경우”라고 말했다. 한 미군 관계자는 뉴욕타임스(NYT)에 “인공위성 사진을 분석한 결과 여객기가 추락 직전 기체에서 밝은 섬광이 포착됐다”면서 “사고원인은 분명히 모르지만 폭발이 일어난 것”이라고 강조했다.
영국 총리실은 4일 성명을 통해 “더 많은 정보가 드러나면서 우리는 그 여객기가 폭발장치에 의해 추락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갖게 됐다”며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필립 해먼드 영국 외무장관은 “기내에 있던 폭발 장치가 폭발을 야기했을 상당한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BBC방송에 말했다.
여객기가 테러로 추락했을 가능성이 커지자 영국 정부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샤름엘셰이크 공항에 남아 있는 영국항공사 여객기들의 이륙을 전면 유보했다. NYT는 여객기 사고와 관련된 대응방안 중 가장 강력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해먼드 외무장관은 “이집트 당국이 샤름엘셰이크 공항에 대한 추가적인 보안 강화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서 “휴양지인 샤름옐셰이크에 머물고 있는 약 2만명의 영국인들을 안전하게 귀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에 이어 아일랜드 항공청(IAA)도 추가 공지가 나올 때까지 샤름엘셰이크 공항을 오가는 모든 항공편 운항을 중단한다고 밝혔으며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 역시 5일 이집트 샤름엘셰이크를 오가는 자회사의 모든 항공편을 취소했다고 AP가 보도했다.
항공편 운항 중단으로 관광산업에 타격을 입게 될 상황에 처한 이집트의 사메 쇼크리 외무장관은 영국에 이것이 “다소 성급한 조치”라며 반발했다.
블랙박스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사고 당시의 기내 정황도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은 “여객기 추락 직전 조종석에서 비정상적인 소음이 블랙박스에 녹음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국제조사단 관계자를 인용해 “이 음성녹음으로 볼 때 승무원들에게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일이 기내에서 벌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고 현장에서 수습한 시신에 심한 화상 흔적이 발견돼 기내 폭발 가능성에 더욱 무게를 싣고 있다.
사고원인을 조사 중인 이집트 당국은 기내 폭발 가능성에 대해선 말을 아낀 채 조종석 음성녹음장치(CVR)을 포함하고 있는 2번째 블랙박스가 파손돼 사고 당시의 정보를 해독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미국과 영국이 제기한 폭탄 설치 의혹에 대해 5일 러시아 대통령실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는 “추락 원인에 대한 어떤 가설이나 이론도 배제할 수 없다”면서도 “단순히 추측에 머무는 것은 배제한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AP는 보도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