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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기억의 저편

입력
2015.11.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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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시골 학교의 빈약한 도서관에는 위인전이나 동화책들이 있었고 그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자유교양반’이라는 동아리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방과 후 활동이어서 얼른 집으로 가고 싶은 내게는 퍽이나 괴로운 일이었으나 선생님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전혀 자유롭지 않은 활동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로 문예반이 되었고 산문반이었던 나는 학교 대표로 이런저런 백일장 따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6학년 때 도 단위의 꽤 큰 백일장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장원은 아니고 차상이었다. 그 백일장에서 주어진 제목은 ‘국기 하강식’이었다.

나는 유신이 선포되던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 2학년 때 대통령이 부하의 손에 죽었으니까, 오롯이 유신 교육을 받은 세대다. 게다가 문예반을 하며 참가한 거의 모든 백일장은 반공 글짓기 대회였다. 학교에 버젓이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같은 구호가 나붙었고 ‘대통령 찬가’를 풍금소리에 맞추어 배우던 시절이었으므로 글짓기의 내용은 사뭇 살벌함과 어린 충성심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반공을 가르쳐도 어린 학생들에게 그것은 가상의 증오일 뿐이었다. 자기가 겪은 것을 솔직히 쓰라는 선생님의 가르침과 달리 실제로 무슨 ‘반공 경험’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반공 글짓기는 매 번 거짓으로 꾸며 쓰게 마련이었다. 상을 받았던 ‘국기 하강식’에서도 나는 애꿎은 친구 하나를 등장시켜 거짓 글쓰기를 감행했고 그다지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백일장 작품들이 책으로 엮여 몇 권이 학교로 배달되었을 때, 책을 읽은 친구가 내게 항의를 해왔다.

“내가 언제 그랬어, 임마. 이게 아주 거짓말만 쳐놨네.”

그 순간 왈칵 부끄러움이 끼쳐왔다. 너무도 분명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깨우침이었고 이후 내가 다시 산문을 쓰기 시작한 것은 수십 년이 흐른 마흔 살이 넘어서였다. 그만큼 그 거짓 반공 글짓기는 내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애국 조회에서 차렷과 앞으로나란히를 반복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오른손을 가슴에 얹은 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조리던 우리는 학교에 동원된 소년단이었다. 학교에 갈 때도 마을 별로 깃발을 앞세우고 줄을 맞추어 걸었고 일요일이면 빗자루를 들고 나와 마을 길을 쓸었다. 이웃에 수상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눈 여겨 보았다가 신고를 해야 하는 의무도 주어졌다.

중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교복에는 목을 죄는 호크가 달려있었고 각반까지 찬 교련복에 목총을 들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허공을 향해 “찔러 총”을 외치던 그 날들이라니. 오직 국가와 반공, 승공, 멸공이 교육 이념이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입된 국가주의는 너무도 허약한 것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몇 권의 교양서적을 읽는 것만으로 십 년 넘게 주입 받았던 국가주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국민교육헌장은 일제 하 천황의 교육칙어였으며 국기에 대한 맹세는 황국신민서사임을 알게 된 충격과 분노는 컸다. 군국주의와 다를 바 없는 국가주의에 대한 거부는 당연한 것이었고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애국가를 부른다거나 국기에 대한 맹세 따위를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집단으로 모여 국호를 외치며 응원하는 월드컵 응원전 같은 곳에도 발길을 하지 못한다.

아마 나의 경우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작가라는 직업 상 남들보다 조금 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맹렬한 반국가주의의 뿌리는 바로 내가 받았던 오랜 국가주의 교육에 닿아있다.

국정 교과서 사태를 보며 어두웠던 기억 저편을 돌이켜본다. 그리고 어쩌면 이 퇴행이 또 다른 전진을 이루어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역사는 언제나 그랬으니까.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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