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편안한 열차를 이용하는 대신 협곡을 걸었다.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경치,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비경(秘境)길’이다. 눈꽃열차로 이름을 알린 이후 경북 봉화 분천역~강원 태백 철암역 구간은 협곡열차(V-Train)로 다시 한번 주목 받고 있다. 때묻지 않은 물길과 산세를 간직한 승부역~양원역 구간은 그 중에서도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이다. 직선거리 약 3.5km, 열차로는 5분이면 되지만 바로 연결하는 도로가 없어 찻길로는 태백산 허리를 돌고 돌아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지형이다. 봉화군은 지난해 이 구간에 ‘비경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레킹 코스를 개통했다. 열차에서는 파악하기 힘든 낙동강 상류의 속살을 파고드는 길이다.
▦세평 하늘 승부역에서 비경길로 빠지다.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은 어느새 승부역을 대표하는 이미지이자 수식어가 되었다. 1963년부터 19년간 승부역에서 근무했던 김찬빈 역무원이 역사(驛舍) 담벼락에 썼다는 시다. 강 맞은 편에 있던 역사를 옮겨 그의 친필은 사라졌지만 시구만은 승부역 조형물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관광열차를 비롯해 이 구간을 지나는 모든 열차가 정차하기 때문에 낮 시간에는 제법 사람들로 붐비지만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옹색한 지형은 여전하다. “이곳에 근무해 보니 이해가 갑니다. 밤이면 사람도 열차도 없이 혼자 남으니…”1년 넘게 승부역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현재 역무원의 심정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김찬빈씨의 시구는 두 소절이 더 있다.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앞 소절이 산골 간이역의 적적함을 표현한 것이라면, 뒤 소절엔 역무원으로서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영주~강릉 구간 철길을 지금은 영동선으로 부르지만, 이 선로가 처음 만들어질 때만 해도 영암선(영주~철암)이었다. 1949년 미국의 원조로 공사를 시작해 1955년에 완공한, 해방 후 한국 최초로 건설한 철도라는 자긍심이 담겨있는 선로다.
비경길은 승부역에서 양원역까지 약 6km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간다. 협곡을 따라가는 길이니 아주 험악한 산길일거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조금 검은 빛을 띤 옥색 강물은 의외로 잔잔해 거친 산악과 대조된다. 가뭄으로 수량이 줄어 든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물줄기의 낙차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바위와 자갈을 미끄러지는 물소리가 가을바람에 섞여 기분 좋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햇살이 부서지는 수면은 한낮에도 그늘을 드리운 산자락과 선명하게 경계를 이루고, 가을 색 짙은 산등성이는 맑은 강물에 추상화를 그린다. 길을 낼 수 없는 일부 구간에 설치한 나무 데크를 빼면 계단도 거의 없다. 굳이 난이도를 따지자면 마실 가는 수준이다. 산이 막히면 에두르는 물길처럼 비경길도 부드럽게 흐른다.
승부역에 진입하는 터널 부근에서 길은 선로와 나란히 이어진다. 왼편 발 아래는 물길이고, 오른편은 철길이다. 운이 좋아 지나가는 열차라도 만나면 그 또한 풍경이다. 데크 길이 끝나는 지점에선 터널을 통과하는 선로와 거의 정면으로 마주치기도 한다. 사람 아닌 괴물같은 쇳덩이가 반가운 것도 이 길에서만 가능한 경험이다.
양원역이 가까워질수록 강폭은 조금 더 넓어지고 산으로 막혔던 풍경도 숨통이 트인다. 저마다의 색깔과 모양을 뽐내는 갈대와 나무, 강물과 산세가 어우러진 풍경은 옛 이발관에 걸려있던 그림처럼 아련하고 이국적이다. 이쯤에선 강물도 한층 잔잔해져 발걸음이 더욱 느긋해진다. 그런데도 2시간이 안 걸렸다. 보통은 1시간 30분을 잡는다.
▦산골주민들이 만든 국내 최초 민자역사 양원역 이야기
드디어 양원역이다. 대여섯만 들어 앉아도 꽉 차는 조그만 간이역이지만 이래봬도 우리나라 최초의 민자역사다(일반적으로 1990년에 완공된 서울 영등포역을 최초의 민자역사로 꼽는다). 막대한 이윤을 기대하고 거대 자본이 투입된 민간투자와는 거리가 멀다. 양원역은‘보통사람들(실제로는 완전히 소외된)’의 고충을 스스로 해쳐나가기 위해 만들어진 역이다.
1988년 마을주민 박길자(74)씨는 코앞에 철길을 두고도 이용하지 못하는 답답한 사연을 편지로 써서 청와대에 보냈다.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내건 ‘보통사람’이라는 슬로건에 용기를 냈다. 외지로 나가려면 해발 500m가 넘는 광비재를 넘어 울진군 광회리까지 가야만 버스를 탈 수 있는 사연, 명절에 자녀들이 이 산길을 넘다가 미끄러져 정성으로 가져온 술병을 깨뜨린 안타까운 사연, 봉화나 춘양에서 열차에 올라 깨지지 않을 짐 보따리는 열차가 마을을 통과할 때 차창으로 내던져 놓고 승부역에서 걸어와 수거해야 했던 사연,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오려고 철길을 걷다 수많은 주민들이 다치거나 숨진 사연 등 원곡마을 주민들의 고충을 두루 담았다.
드디어 마을에 정차 결정이 내려지고 철도청에서는 침목 몇 개로 승강장을 설치했다. 나머지는 주민들의 몫이었다. 당시 경운기가 1대 밖에 없어 온 마을 사람들이 흙과 돌을 이고 지고 와서 플랫폼을 고르고 벽돌을 날라 대합실을 지었다. 그렇게 오랜 숙원이 이루어졌지만 역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용객이 없어 폐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주민들이 철도청을 찾아가 호소하고, 나중에는 30여 가구 마을 주민들이 2~3명씩 조를 짜서 매일 열차 유랑을 떠나는 웃지 못할 방안까지 동원했다. 하릴없이 봉화역이며 철암역까지 가서 시간을 보내다 다음 열차를 타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 지난한 시간에 대한 보상일까? 눈꽃열차와 협곡열차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양원역은 이제 모든 열차가 쉬어가는 역이 되었다. 덕분에 주민들도 외지에서 오는 자녀들에게나 챙겨주던 귀한 버섯과 산나물, 잡곡과 꽃차 등을 팔아 용돈에 보태고 있다.
걷기 길은 ‘체르마트길’(봉화군과 자매결연을 맺은 스위스 알프스 기슭의 도시 이름에서 따왔다)로 비동 임시승강장까지 이어지고, 분천역까지는 ‘세평하늘길’로 연결된다. 양원역에서 분천역까지는 열차를 이용해보는 것도 괜찮다. 시속 30km로 천천히 운행하는 협곡열차는 유리창이 지붕까지 트여있어 협곡의 풍경을 시원하게 감상할 수 있다.
봉화=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여행메모]
● 서울에서 출발하는 중부내륙 순환열차(O-Train)가 매일 1회, 동대구와 부전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가 3회, 분천~철암 협곡열차가 3회 운행하기 때문에 열차 시간을 잘 맞추면 비경길 코스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분천역(09:44)을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고 승부역(09:57)에서 내려 비경길을 걸은 후 양원역(12:58)을 출발하는 협곡열차를 타고 분천역(13:10)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가장 일반적이다. 협곡열차는 트레킹 이용자들을 위해 양원역과 분천역 사이 비동임시승강장에도 잠시 정차한다. ●비경길을 걸으려면 분천역에서 물과 간식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산타마을로 꾸민 분천역은 추억사진을 찍기 좋게 다양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마을에 먹거리 장터와 카페도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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