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기자인 한 지인이 또 한 권 책을 썼다. 이번에는 고쳐 쓴 책이다. 첫 직장인 신문사를 그만두고 냈던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래 준비하다 이제 비로소 개정판을 냈단다. 신문사 재직 당시 글 잘 쓰는 기자였던 그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했다. 전업 작가로 나서며 쓴 소설이 문학상을 받고, 두 번째 낸 논픽션이 주목을 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변신은 성공적인 듯했다. 그러나 두어 해 뒤 전업 작가 생활을 접고 또 다른 직장에 자리를 잡은 그는 말했다. 바깥세상이 너무 춥더라. 그랬던 그가 글을 쓰고 오랜 만에 책을 냈다는 건, 어렵사리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을 그만 두고 다시 바람 찬 세상에 나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SNS에 퇴직을 하는 지인들의 소식이 자주 들린다. 대부분 50대, 이유는 다양하지만 흔한 것이 정년이나 명예퇴직이다. 은퇴하기에는 너무 젊은 세대, 고령화 사회에서 50대 은퇴는 지나치게 이르지만 어쨌거나 현실이다. 긴 직장 생활을 하다 떠나는 이들의 명암은 엇갈린다. 가장 복돼 보이는 이들은 연금 등으로 노후가 보장된 이들이다. 출근 부담, 일 부담, 돈 부담에서 벗어나 좋은 곳 찾아 유유자적하는 삶을 누리는 것이다.
드물지만 나이가 들수록 승승장구하는 이들도 있다. 더 큰 권력이나 돈벌이를 쫓아 이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급속히 좁아지는 문을 통과하기 위해 세상이야 어찌됐든 권력과 돈에 아부하는 이들도 흔하다. 이들의 노추가 보기 흉하지만 대놓고 욕하지 못하는 것은 추운 바깥세상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을 더 해야 하는데 일이 없는 이들이다. 당장 먹고 살며 아이 양육하기에도 빡빡한데 노후는 어찌할까. 운이 좋아 아이가 커서 급박한 경제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해도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의 문제도 여간 아니다. 흔히 퇴직자의 출근지는 북한산이나 도서관이라지만 그것만 하기에는 남은 세월이 너무 길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약 53세. 평균 기대수명이 82세에 가까우니 30년 세월이 남은 것이다.
배울 만큼 배웠다고 느낀다, 걸핏하면 ‘이 나이에’라고 말하거나 생각한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고 느낀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좋다, 좋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좋다, 스스로 늙었다고 느낀다….
어느 책에서 읽은 ‘노인’의 정의 중 일부다. 여기서 체력 저하나 기억력 감퇴 등 생리적인 노화보다 중시하는 것은 마음의 상태다. 노인은 다만 나이든 사람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고생하며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다시 시작하려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노인이다. 어쩌면 50대 이후의 급속한 보수화, 수구화도 이와 관계가 있지 않을까. 전직 기자 지인이 자신의 일을 찾아 좋다는 직장 박차고 나온 것이 주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힌두교에서는 인생을 네 단계로 나눈다고 한다. 학습기(學習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 유행기(遊行期)다. 결혼해 아이를 양육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가주기까지가 정년까지라면 집을 떠나 홀로 수행하는 임서기와 세상을 유랑하는 유행기는 정년 이후에 해당한다. 즉 정년까지가 가장의, 사회인의 의무를 다하는 시기였다면 정년 이후는 그 의무 때문에 억눌러왔던 자신의 삶을 사는 시기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년 이후야말로 그 동안 온갖 의무 때문에 못했던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시기 아닌가.
돌아보면 내가 속한 인문학 공동체에도 그런 사람은 없지 않다. 아니, 돈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공동체 자체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직장을 그만두고 새 책 낸 지인의 소식에 눈이 번쩍 뜨인 것도 자신의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멋졌기 때문이 아닐까.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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