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가장 열렬히 시청한 시기는 2010년 여름이 아닐까 싶다. 저 유명한 Mnet의 ‘슈퍼스타K 시즌 2’가 그것이다. 나는 원래 텔레비전은 거의 시청하지 않고 K팝에도 별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처음엔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생후 50여일 쯤 된, 유난히 밤잠 없는 아기를 키우고 있었는데 밤 열한 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아기를 재웠다. 한숨 돌리며 무의식적으로 리모컨을 눌렀을 때 마침 1회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화요일부터 금요일 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됐다. 한번은, 요일을 착각하고는 목요일 밤에 설레는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가 크게 실망한 적도 있었다. 그 무렵, 그 프로그램은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생생하고 유일한 창구였는지도 모른다.
슈스케 시즌 2는 가요 오디션 프로그램의 붐을 주도했다고 할 만큼 화제를 끌었다. 실력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 역시 출연자 한 명을 마음 속으로 정해두고 열심히 응원했다. 그가 생방송 무대에 진출하고 나서는 난생 처음 문자 투표라는 것도 해 보았다. 응원하던 출연자가 탈락한 후에도 금요일 밤을 기다리는 열망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더 객관적이고 차가운 시각으로 후보자들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TV 앞에서 나는 가차 없이 품평했다. 일관성은 없었다. 저 참가자의 창법은 너무 대중적이며, 또 다른 참가자의 창법은 너무 비대중적이라는 식이었다. 전문심사위원들이 내가 옹호하는 참가자의 손을 들어주었을 땐 괜히 으쓱해졌고, 그와 반대일 땐 심사위원을 어떻게 뽑은 거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디션 프로그램 시청은 나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던 게 분명하다.
TV 앞에서 내가 혼자 떠들어대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내 목적은 거기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합법적으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에서의 내가 늘 타인의 평가를 받는 사람인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작가로서 작품에 대해 받는 평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아기가 덜 먹고 덜 자는 게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은 초보엄마의 정체성부터 이러다 영원히 일의 세계에 복귀하지 못할지 몰라 두려워하는 여성 직업인의 정체성까지 내 안에는 ‘내가 너무도 많았고’ 그 많은 ‘나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 앞에 민감하게 솜털을 곤두세운 채 살아왔던 것이다. 혹시 그 피곤했던 자아들이 나만의 주관적인 잣대로 남을 평가하는 유사 심사위원 혹은 유사 면접관 노릇을 하면서 위안을 얻었던 게 아닌지, 지금에서야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어릴 때부터 사사건건 평가 받는 곳, 무수한 이력서를 내고서도 다만 심사자가 선택해주기만을 묵묵히 기다려야만 하는 수백 만 구직자 시대의 한국에서 각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난립하는 건 기묘한 우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이유가 시청자들이 참가자에게 감정이입 해서라는 분석은 어쩌면 절반만 옳다. 꽤 많은 시청자들은 천신만고 끝에 생존하거나 아쉽게 탈락하는 참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심사위원 쪽에 이입하는 편을 택한다. 실제로 개인이 던지는 한 표의 지지나 반대는 오디션 결과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남을 마음껏 평가할 수 있는 그 드문 기회가 어떤 판타지와 닿아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얼마 전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젊은 가수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그가 노래하던 모습을 스치듯 봤던 게 떠올랐다.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이 평가 권하는 시대, 가슴 속에 박힌 미묘한 죄책감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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