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라 잃은 3,200만 쿠르드족 비극 못지않게 중동을 달구는 또 다른 소수민족 문제가 ‘아르메니아 인종학살’ 논란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을 전후해서 오스만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명이 강제추방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조직적인 인종청소(제노사이드)를 당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국제사회를 통해 제노사이드 인정과 함께 공식사과와 재산반환 및 보상 등을 터키 정부에 요구해 왔다. 하지만 피해자인 아르메니아와 가해자인 이슬람권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다. 하지만 정부 차원에서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라기보다는 전쟁의 와중에 발생한 불행한 유혈충돌의 결과라는 것이다. 오히려 오스만제국 국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1차 세계대전 중에 적국인 러시아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킨 데 따른 불가피한 대응조치였으며, 아르메니아인들의 봉기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을 정치 쟁점화하는 것은 터키의 유럽연합(EU) 가입을 막고 고립시키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외교적으로 강경 대응을 해왔다.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 터키에게 불리한 국제 흐름
아르메니아인 학살 100주기를 맞은 올해 상황은 터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한 데 이어 4월 유럽의회가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23개국이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에는 참여국이 향후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징역형과 벌금형을 받게 되는 법을 만들도록 하는 조항도 담겨 있다. 사실상 제 2의 홀로코스트 부정법이 발효된 셈이다. 하지만 미국은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터키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관련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이슬람권의 반응은 싸늘하다.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고, 튀니지ㆍ모로코ㆍ알제리 등을 식민통치하면서 수백 년간 아랍인 박해와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역사적 과오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자신의 죄는 감추면서 역사적 사실을 과장해 아르메니아 문제를 터키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나아가 이슬람권은 서구가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실제보다 지나치게 과장 증폭하여 이스라엘의 부당한 팔레스타인 침략을 정당화해주려는 것과 유사한 움직임이라는 의심을 하고 있다.
서구의 비난에 대해 터키와 이슬람권 일각에서는 아르메니아 무장 단체들의 테러행위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 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의 터키에 대한 투쟁은 격렬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전화를 받았다. 당시 그들에게 유럽은 지옥의 근무지였다. 아르메니아 극우단체 '아살라(ASALA)'의 표적 테러로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46명에 달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평화롭게 공존하던 두 민족의 갈등은 19세기말부터 조금씩 악화되기 시작했다. 오스만제국 치하의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6백년 가까이 ‘밀레트(Millet)’라는 종교-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자국법과 관습을 지키면서 거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누렸다. 1876년 9월 이스탄불 주재 영국대사였던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는 ‘오스만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돼 있다. 19세기말 오스만제국의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도 그만큼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1877, 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터키 영토였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같은 정교문화권인 러시아를 지원했다. 이를 계기로 훈체크ㆍ다시나크파 같은 정당이 설립되고 아르메니아 독립 투쟁단체들도 결성됐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ㆍ비트리스ㆍ반ㆍ엘라지으ㆍ디야르바크르ㆍ시바스 등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고, 오스만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겨냥한 테러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됐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이들의 배신행위로 인해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의 계기가 됐다.
오스만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4년 11월 1일 독일ㆍ오스트리아와 함께 동맹을 맺고 참전했다. 무엇보다 쌍방 50만명 이상의 희생을 낸 1차 세계대전의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다다넬스 해협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와 대결한 동부전전을 안정화시켜야 되는 절대절명의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 때 자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오스만 군대를 공격하자,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고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하는 한편 내부의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강제 이주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강제이주에 따른 추위와 굶주림, 질병 등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4월 24일을 학살추모일로 정하고 있는 배경이다.

전쟁 중 불가피한 희생이냐, 조직적 학살이냐
현재 아르메니아 학살사건의 쟁점은 두 가지다. 조직적인 명령에 의한 학살 여부와 사망자 숫자다. 터키당국은 전쟁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일어난 불행한 충돌로 부는 반면 아르메니아는 당시 내무장관 탈라트 파샤의 강제이주명령서를 내세우며 조직적인 제노사이드 시도로 보고 있다. 희생자 숫자에서도 아르메니아는 150만명 학살을 주장하고 있지만, 터키는 70만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는 입장이다. 서구 자료들은 대부분 60만~150만명 사이를 오간다. 학살자 숫자의 차이도 조직적 학살이었느냐는 논란만큼 인식 차가 크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인구는 오스만제국의 통계에선 129만5000명,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6,000~150만명으로 집계된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학살자 숫자 확인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인은 물론 이주와 도망, 질병 등으로 숨진 오스만제국 시민들의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명에 이른다는 점이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일일이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인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은 뒤로 미룬 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주로 다뤄졌다는 점이다. 오스만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들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들고 나와 터키 정부를 괴롭혔고, 터키의 극우정당들은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아르메니아인 학살 자체를 부정해왔다.
양국 역사학자들의 공동 연구에 의한 미래 바로 세우기
현재 아르메니아는 쿠르드인들과는 달리 터키 북서쪽에 독립국가를 건설했다. 이제 소모적인 정쟁보다는 합리적인 역사적 실체규명을 통해 민족적 앙금과 적개심을 치유하고, 미래 지향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는 시점에 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 진실을 우선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이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제멋대로 해석되고 악용 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희 수(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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