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왕자'의 밑바닥을 훑다
서른 살 마약단속국 엘리트 경찰 부패 단속에 위장 요원으로 침입
도청기 발각돼 살해 위험 겪기도
로빈 무어의 논픽션 ‘프렌치 커넥션’이 출간된 게 1969년이다. 프렌치 커넥션은 중동 지역 아편이 프랑스에서 헤로인으로 가공돼 미국 동부로 반입되는, 60년대 최대의 마약 밀매 카르텔을 일컫는 말. 책은 뉴욕경찰청(NYPD) 마약단속국 형사들이 그 유통 조직을 추적ㆍ소탕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71년 진 해크먼이 주연한 윌리엄 프리드킨의 동명의 영화는 큰 인기를 끌며 아카데미 작품상 등 5개 부문 상을 탔다.
책과 영화 사이, 그러니까 70년 뉴욕타임즈는 로빈 무어가 책으로 소개한 것과는 딴판인 NYPD 부패ㆍ비리 실태를 폭로하는 기사를 1면(4월 25일자)에 실었다. 브루클린과 브롱크스 지역 순찰대 소속 이탈리아계 경찰 프랭크 서피코(Frank Serpico, 1936~)의 제보로 쓴 기사였다. 서피코는 앞서 67년 자신이 수집한 비리 사실들을 감찰당국에 보고했지만 전혀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언론 제보를 결심한다. 보도 직후 당시 뉴욕 시장 존 린제이(John Lindsay)는 지방검사 위트먼 냅(Whitman Knapp, 1909~2004)을 의장으로 한 경찰부패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냅 위원회’는 그 해 6월부터 조사 활동을 시작해 72년 8월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서피코의 폭로는 그야말로 맛 뵈기였다. 영화의 감동에 취해 있던 이들의 생각과 달리, 또 부패 경찰이 있다 해도 얼마 안 될 테고 비리라 해도 자계(自戒)의 선은 있으리라 여기던 일반적 예상과도 달리, 그들은 압수한 마약을 팔고 수익금을 단속 현장에 없던 요원들에게까지 분배하고 있었다. ‘소매’만 한 것도 아니었다. 자타 공인 엘리트 경찰로 통하던 NYPD 마약국 특별조사팀(SIU), 길거리 조무래기 소매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카르텔 유통 거점과 거물들만 추적ㆍ단속하는 임무를 띤 SIU가 프렌치 커넥션의 한 고리였다.
72년 SIU 전체 요원 70명 가운데 52명이 기소됐다. 한 판사는 경찰 신분증을 지닌 채 검은 돈으로 최고급 양복에 비싼 차를 몰고 다니며 돈을 물쓰듯 쓰던 그들을 ‘프린스 오브 더 시티(Princes of The City)’라 불렀다.
죄의식 겪으며 애물단지 20년
'동료 배신' 냉대와 멸시에 더해 불공정한 법원 판결… 최악 결말
민원 처리·강사 등 한직 전전
미국인이 되고 싶었던 이민 가족
이탈리아계 이민 2세로 태어나 이름마저 영어식 발음 교육 받아
정보원 아닌 비밀요원으로 기억바라
냅 위원회의 거의 모든 조사 성과는 30세 신참 SIU 요원 로버트 루시(Robert Leuci)의 활약 덕이었다. 냅 위원회의 설득으로 위장요원(Undercover)이 된 그는 조사기간 16개월 동안 무선마이크를 숨긴 채 동료들과 생활하며 비리 현장을 위원회에 생중계했다. 그는 도청기가 발각돼 두 차례나 동료들에게 살해 당할 위기까지 겪기도 했다.
서피코도, 그보다 4살 아래인 루시도 브루클린 출신의 이탈리아계 이민 2세였다. 루시는 파이프공장서 일하던 아버지와 봉제공장 직공이던 어머니 사이에서 1940년 2월 28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린 루시에게 성을 이탈리아어 발음(레우치)이 아닌 영어식(루시)으로 발음하게 했다. “아버지는 미국인이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끊임없이 일깨워주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NYT, 15.10.13) 퀸즈의 존 애덤스 고교를 졸업하고 캔자스 베이커 대학에 입학한 19살에 그는 ‘미국인이 되기 위해’ NYPD 아카데미에 입교했고, 2년 뒤 염원하던 NYPD 배지와 휘장을 단다. 퀸즈와 맨해튼, 브롱크스 순찰대원으로 일하던 그가 마약단속국 사복형사로 승진한 것은 24살 되던 64년이었고, 또 몇 년 뒤 SIU요원으로 발탁됐다. 그는 발군의 검거 실적을 지닌 뛰어난 경찰관이었다. 그리고 이내 부패 경찰이 됐다. 훗날 자서전(‘All the Centurions’)에서 고백했듯, 당시의 그에겐 소속감이 절실했고, 부패는 가장 강력한 유대의 끈이었다.
냅 위원회가 그를 고른 까닭은 확실하지 않다. 위원회 멤버로서 그를 설득한 이는 당시 검사였던 니콜라스 스코페타(Nicholas Scoppetta)였다. 스코페타는 “루시는 나쁜 경찰이었지만 그에겐 좋은 편이 되려는 의지가 있었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만 말했다. 상대적으로 젊어(그 무렵 30세였다) 물이 덜 들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테고, 72년 매거진‘라이프’보도처럼 “흑발에 구레나룻, 잘 생긴 얼굴에 젊음의 기대감이 가득 담긴 온화한 갈색 눈동자의 그가 누구든 어떤 일에서든 확신을 줄 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루시가 위원회의 제안에 선뜻 응한 건 물론 아니었다. 오래 망설인 끝에 그는 조건을 달았다. 조사 타깃이 경찰만이라면 협조하지 않겠다, 뉴욕 범죄정의시스템 전체가 부패했고 경찰은 그 시스템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라는 거였다. 동료들을 배반해야 하는 그로서는 직업 윤리와 자존심 이전에 인간적 고뇌를 견딜 수 있는 명분도 필요했을 것이다.
스코페타가 어떤 약속을 해줬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그는 냅위원회에 협조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동기를 말하라면, 그건 (처벌의) 두려움이 아니라 죄의식이었다”고 말했다. 그 죄의식은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서피코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서로 알고 지냈다는 기록은 없지만, 아마 그는 한 동네에서 자란 네 살 위 서피코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70년 언론 폭로 이후 서피코가 경찰조직 내에서 겪은 멸시와 따돌림도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71년 2월 서피코는 동료 셋과 함께 브루클린의 한 아파트 마약 소굴을 덮치다 총에 얼굴을 맞는 중상을 입는다. 그는 대문을 두드리라는 상급자의 지시를 따랐고, 열린 문 틈으로 쏜 범인의 총을 맞았다. 엄호해야 할 동료는 이미 사라진 뒤였고, 911에 신고해 피투성이의 그를 살린 것도 아파트 이웃 주민이었다. 그 부상으로 서피코는 한쪽 청력을 잃었고, 뇌에 박힌 파편으로 만성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사고 정황에 대한 경찰 공식 조사는 없었다. 71년 12월 냅 위원회 진술에서 서피코는 “비리 폭로 이후 지난 5년간(67년 기점) 상급자들로 인해 내가 감당해야 했던 절망과 불안을 다른 누구도 겪지 않게 하고자 이 자리에 섰다”고 말했다.(위키피디아) 서피코는 이듬해인 72년 6월 경찰 제복을 벗었다. NYPD는 그에게 명예메달(Medal of Honor)을 주었지만, 수여식도 은퇴식도 없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도망치듯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의 사연은 73년 12월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형사 서피코(감독 시드니 루멧)’로 개봉됐다.
서피코와 달리 로버트 루시는 1981년까지, 그러니까 냅 위원회가 해체된 뒤로도 근 20년 동안 여전히 NYPD 경찰로 근무했다. 그는 서피코처럼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냉대와 멸시는 거의 고문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동안은 경호요원의 보호를 받아야 했고, 이후로는 24시간 총을 휴대한 채 등 뒤를 흘끔거리며 살아야 했다. 폭스바겐 타이어 네 개가 모두 찢긴 적도, 유리창이 박살 나 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건 동료들의 차갑고 따가운 시선이 아니라, 또 다른 죄의식이었을 것이다. 재판이 진행되던 4년여 사이 기소된 동료 2명이 리볼버로 자살했고, 둘은 심장마비로 숨졌고, 한 명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기소된 이들 중에는 루시 자신의 현장 파트너도 포함돼 있었다. 물론 루시는 공로를 인정받아 기소되지 않았다.
위장요원이 되면서 그가 내건 ‘조건’이 만족스럽게 이행되지도 않았다. 81년 뉴욕타임스는 당시 기소된 SIU 요원 중 헤로인 5㎏을 판매하는 등 가장 죄질이 나빴던 이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난 반면, 그 거래로 번 돈을 나눠 가진 루시의 두 동료가 각각 징역 10년형을 받은 사실을 보도하며 “판결은 불공정했다”고 썼다. “검찰은 불공정했고, 판사는 편견을 갖고 있었다. 조직 범죄자들조차 경찰들보다 관대한 형량을 받았다.” 루시로서는 최악의 결말이었을 것이다. 뉴욕 시로선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게 경찰이었다. 그나마도 일부는, 뉴욕타임스가 보건대, 마땅히 흘려야 할 피보다 턱없이 적거나 많은 피를 흘렸다.
SIU는 당연히 해체됐다. 루시가 옮길 만한 부서도 마땅히 없었다. 그는 NYPD의 애물단지가 됐다. 이후 루시는 시민민원 처리부서 등 내근 부서와 경찰아카데미 등을 전전했다. 그는 더 이상 그가 바라던 경찰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서피코처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는 도망자로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갈등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을 (동료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스코페타와 처음 대화한 뒤 내가 느낀 죄의식을 납득시키자면 내가 먼저 미칠 지경이 된다.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NYPD 부국장으로 냅 위원회에서 활동하다 은퇴한 로버트 데일리가 당시 활동기를 78년 ‘Prince of the City’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형사 서피코’를 감독한 시드니 루멧이 다시 동명의 영화를 만든 건 81년 8월. 루시는 영화 개봉 직전인 그 해 7월 은퇴했다. 그 무렵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루시는 “나는 변절자도 괴물도 아니다. 다만 다른 형사들의 반영일 뿐이다. 바르고 정직한 경찰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 자신들이 한 일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잘 사는데, 왜 나만 이렇게 괴로워해야 하나?”라고 반문했다. “물론 내가 행한 일 때문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끔찍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감정적인 측면이 있다. 나의 그 감정은 뭔가가 달랐기를 원한다.” 그는 99년 인터뷰에서 오랫동안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도 말했다. “극도의 죄의식을 느끼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가니까 조금씩 누그러지더라. 이제는 죄의식이 안 든다는 사실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곤 한다.”(뉴욕포스트, 1999.5.14)
그를 연기한 배우 트리트 윌리엄스(Treat Williams)는 촬영 전 루시를 만나 며칠간 함께 지냈다. 윌리엄스는 “나는 루시를 좋아하지만 그를 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그는 영웅이나 스타가 되길 원했고, 무엇보다 이해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주문한 단 한가지는 ‘나를 겁쟁이(wimp)처럼 보이게 하지 말아달라’는 거였다. 그는 시민들이 자신을 울보로 여기는 걸 원치 않았다”고 말했다.(NYT, 1981.8.9) 은퇴 후 루시와 그의 가족 역시 증인보호프로그램에 따라 한동안 뉴욕 주 바깥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
1999년 5월 에릭 투레츠키(Eric Turetzky)라는 NYPD 형사가 동료 경찰관의 피의자 학대 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그는 상급자가 아이티 이민자 여성을 수갑 채워 화장실로 끌고가 나무 막대기로 성고문 했다고 폭로했고, 그 역시 날뛰는 임산부의 배를 걷어찼다고 자백했다. 루시는 뉴욕포스트 인터뷰에서 투레츠키를 동정하며 “경찰관의 문제는 대개 다른 경찰관들에게 둘러싸여 산다는 것이다. 그건 단순한 일(job)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계(world) 문제다”라고 말했다. 서피코는 “엄청난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면서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내부고발자(Wistle blowers)라고 불리지만, 나는 ‘등불을 켜는 자(Lamp Lighters)’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냅 위원회 위원장 냅 위트먼은 자신이 한 일의 의의는 몇몇을 기소해서 어떤 처벌을 받게 한 것이 아니라 부패에 대한 경찰의 인식과 경찰 문화를 바꿨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는 위원회를 이끈 공로로 닉슨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연방지방법원 판사로 영전했다. 스코페타 검사도 이후 여러 분야의 뉴욕시 특별위원회에서 일했고, 뉴욕소방국장을 지냈다. 루시는 2004년 자서전을 내고 작가로 데뷔했다. 그 무렵 인터뷰에서 그는 “마약국 시절 나는 변명의 여지 없는 부패 경찰이었다.(…) 지금 내겐 손주 5명이 있다. 그들도 그 내용을 읽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6권의 느와르 소설과 단편소설 드라마대본 등을 썼고, 로드아일랜드 대학 외래교수로 창작을 가르쳤고, 10월 12일 별세했다. 향년 75세.
스코페타와 루시는 말년까지 서로 연락하며 지냈다. 그는 루시가 숨지기 몇 주 전 나눈 대화를 소개하며 “루시는 ‘Informant(끄나풀)’가 아니라 ‘Undercover(비밀요원, 비밀수사관)로 기억되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더 원한 것은 그냥 뉴욕경찰이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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