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252쪽ㆍ1만5,000원
한문학자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책을 참 많이도 썼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같은 굵직한 학술서 외에 한문으로 된 옛글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편안하고 맛있는 글솜씨로 풀어낸 대중교양서 여러 권은 베스트셀러다. 서 말 구슬을 꿰어 근사한 목걸이를 만들 듯 수많은 예화를 언급하며 한 꾸러미로 엮어내는 비결이 뭘까 늘 궁금했는데, 이 책을 보니 짐작이 간다. 밥 먹듯이 읽고 숨 쉬듯 기록하기, 오직 이것이다.
‘책벌레와 메모광’은 한중일 옛 전적에서 찾아낸 작은 편린들로 짠 피륙 같은 책이다. 가볍고 부드러워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술술 읽기에 좋다. 작정하고 그리 하진 않았겠으나 꽤 실용적이기도 하다. 요즘 세상에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고 지금 당장 따라해도 좋을 옛 사람의 공부법, 독서법이 잔뜩 들어있기 때문이다.
제목대로 책에 미친 책벌레와 기록에 홀린 메모광 이야기다. 짧은 산문을 묶은 이 책은 그가 2012년 7월부터 1년간 동양학 연구의 본산인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서 머무는 동안 이곳 도서관에서 본 한중일 고서적에서 마주친 옛사람들의 자취를 추린 것이다. 한 권의 책에서 그 책을 쓰고 읽었던 옛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생각을 상상하며, 오늘에 비추어 본 즐거운 경험을 전달하고 있다.
고서에 찍힌 장서인에서 그 책의 내력을 읽어내고, 100년도 더 된 책의 책갈피에 압사당한 채 붙어 있는 모기에서 ‘모기를 증오함’이라는 시를 남긴 다산 정약용을 기억하며 슬며시 웃음을 짓기도 한다. 인쇄본이 드물던 시절, 돈 받고 남 대신 책을 베껴 써주는 용서(傭書)로 생계를 잇던 용서인들의 애처로운 이야기, 밭일을 하다가도 항아리 속에 넣어둔 감 잎에 그때그때 떠오른 생각을 적어두어 기억을 붙잡던 중국 선비의 고사와 이를 본떠 메모집을 만들었던 조선 선비들, 벼루에 얼음이 끼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쓸 수 있을 정도로 불기 하나 없이 한겨울 추운 방에서 동상으로 부어 오른 아픈 손가락으로 쉼 없이 책을 읽고 메모를 했던 이덕무의 정열…. 자잘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수두룩하다.
색인 카드를 작성하듯 메모를 주제별로 갈무리했다가 책으로 완성한 이야기며, 읽은 것을 치밀하게 정리하고 발전시키려고 이런저런 방법으로 공부에 매진한 사례 등 이 책에 나오는 예화는 감탄스럽기도 하다.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연암 박지원, 이덕무, 다산 정약용이다. 중국과 일본의 고서 전문가, 옛 지식인도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합류해 풍성함을 더한다. 소품집이지만 그 안에 다채로운 풍경을 펼쳐 놓았다. 정민 식 글쓰기, 그 다작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에서 한 수 배울 수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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